항일 운동의 성지 조설대(朝雪臺)
항일 운동의 성지 조설대(朝雪臺)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용준 한국문인협회 이사/작가/논설위원

도로명 주소는 그 지역의 역사나 전설적 인물과 관계있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제주도청의 경우 문연로인데 문연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았더니 현 제주도청 별관 앞에 있던 문연사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문연사는 구한말 제주에 유배되었던 면암 최익현과 제주의 선비 이기온을 모신 사당이다. 면암은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하며 10년간 집권해온 그를 권좌에서 물러서게 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소문의 문구가 지나치게 과격하다하여 탄핵을 받고 제주에 유배를 왔다.

이때 제주의 선비 이기온이 면암과 친교를 맺게 되는데 면암은 이기온에게 귤당이라는 호를 주었다.

최익현은 1895년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국모의 원수를 갚기를 결심하며 여러 번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으나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령에 반발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조약이 무효임을 천명하며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항거했다.

한편 이기온은 최익현과 교유하며 그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1881년 사설학당으로 오라리에 ‘문음서숙’을 열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의 아들 이응호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문연서당’을 열었다. 그 제자들이 면암과 귤당의 유덕을 추모하는 문연사를 1931년 설립하여 정월 중순에 제를 지내고 있다.

이 문연사는 신제주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연미동 망곡단이 있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망곡단은 국상이 난다든지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도내 유림들이 모여 제를 지내며 곡을 하던 장소였다.

1904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강제의정서를 발표하자 이응호는 전도의 유림 대표 12인으로 비밀항쟁결사체인 집의계를 결성하며 ‘의병을 일으켜 의거로써 항쟁할 것’을 다짐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집의계원들은 망곡단에 모여 결사항쟁을 결의하면서 망곡단을 ‘조선의 치욕을 설욕한다’는 의미의 조설대로 개칭하며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왜인들의 철저한 감시로 의병활동은 하지 못하고 계원이었던 이응호는 ‘탁라국서’, 김석익은 ‘탐라기년’을 저술 애국향토애를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이들의 정신과 행동은 전도에 알려지고 후에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구좌해녀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지배를 공식화했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워 옛 고구려의 영지 만주를 점령했다.

또한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아래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동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강탈했고 미국을 침공하면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로인해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희생시켰는데도 보상은커녕 진심이 담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일본은 아직도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해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한 개헌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이 군대를 갖췄을 때 영토 분쟁을 하고 있는 한국, 러시아, 중국 등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 질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과거 전쟁의 명분으로 왜곡된 역사를 내세웠다.

지금 일본은 극우 편향으로 교과서를 개정하면서 다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매년 맞이하는 광복절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의미가 퇴색하고 있는 느낌이다.

항일 운동의 성지 조설대가 너무 초라하다. 상징물이라도 세워 선인들의 뜻을 기리고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