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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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수필가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영화 제목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인터넷을 검색해서 대강의 줄거리를 읽다보니 제목이 ‘그 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같기도 하고 좀 헷갈린다. 굳이 이 영화제목을 꺼내든 것은 낯선 산행객과 나눴던 산중대화가 떠올라서다.

전남 장흥, 천관산에서의 일이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라 짜여 진 계획 같은 게 없다 보니 내 일정은 늘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걷고 싶으면 걷고 산이 좋으면 산으로 방향을 틀면 되니까. 이러다보니 매끈한 일정의 관광만을 여행이라고 추임새를 넣고 싶지 않은 속내도 한 몫을 한다. 길에서 조우하는 모든 걸 여행이라고 치부하면 맘이 편하다.

그 날도 잠자리에서 날씨를 검색했더니 쾌청이었다. 그래서 산행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 겨울, 영암 월출산에 올랐을 때 천관산이 좋다는 말은 들었으나 날씨 때문에 오르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 서운했던 기억이 나를 유혹했다.

늘 겪는 일이지만 혼자 산행을 할 때는 산에 높게 오를수록 막연하게 외로움 같은 걸 느끼게 된다. 평소에 그냥저냥 지내던 동행이 그리워지는 것도 이때다. 내가 올라 본 육지의 산들은 거의가 한라산처럼 북적대지 않았다. 좀 고적하달까.

천관산은 초행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산을 오르다가 산중턱 너덜겅을 막 넘었을 때 혼자 걷는 등산객과 조우했다. 산중에서 낯선 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건 피로를 덜어주는 청량제나 진배없다. 그도 말벗이 그리웠던 듯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길이 트였다.

날씨 이야기며 어디서 왔느냐, 산을 좋아하느냐. 이런 말을 화두로 둘의 대화는 조신하게 깊어 갔다. 그는 나보다 열두 살이나 연하였다. 사대 독자인 그는 조부의 유별난 손자 사랑 덕분에 호적상 나이가 줄었다며 잠깐씩 가정사를 덧댔다.

둘의 대화는 등산이야기로 이어지다가 지난 4월에 있었던 국회의원선거로 화두가 옮아갔다. 그는 정치 쪽으로 말길이 잡히자 서슴없이 열변을 토로했다. 좀 격하게 정치 담론을 펼쳐가던 그가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일찍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을 때, 정부의 산아제한시책에 호응하여 남성 피임수술을 받게 되더라는 말을 꺼냈다. 이 말을 하면서 이런 게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거라며 주저 없이 목소릴 높였다. 그는 정관수술 같은 건 후진국 형 정책이었다며 격앙된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가 에두르는 그 수술 후의 가정사에 대하여는 아니 들음만 못했다. 무람을 초월한 대화 속에 언뜻언뜻 자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다 세월 저 편의 일이었다고, 망각이란 이름으로 지워버리기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사연이었다.

국가가 권장했던 수술, 정부시책에 호응하여 그 수술을 받아야했던 이들에게 국가는 어떤 개념으로 다가설까. 그 때 국가는 말했다. 인구 팽창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내 지인 중에도 그 수술을 받은 이가 몇 있기는한데 나는 그들이 내밀한 가정사를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말 못할 가정사가 있는 건 아닐지. 그의 말마따나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정책으로 누군가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건 슬픈 대목이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정책이었으면 참 좋을 성싶은데, 그런 정책이 몇이나 될까. 그와 헤어질 때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정책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손을 잡았다. 여운이 아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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