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제주를 너무 사랑하는 '소문난 마당발' 정형외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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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원찬 대표(사진원쪽)는 정형외과의사로 인정받으며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김만덕기념 사업을 꼼꼼히 챙기는 열정을 보인다. 사진은 지난 6월 김만덕 나눔쌀 전달식 모습

양원찬 (사)김만덕 기념사업회 공동 대표의 직업은 정형외과 의사다.


두산 OB베어스 팀 닥터, 88 서울올림픽 때는 국가대표 팀 닥터, 그 후에도 국가대표 유도.탁구 팀 주치의를 맡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의사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의사라는 전문 직업을 가졌지만 워낙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그의 인맥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 정관계는 물론 스포츠계나 연예계까지 마당발이다.


그러한 이력 때문인지 그의 활동 영역도 광범위하다.


서울도민회장, 재외제주도민총연합회장,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범국민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양대 총동문회장은 현재 연임 중이다.

 

▲제주에서 자란 토박이

양원찬 김만덕 기념사업회대표는 제주시 동문통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제주동초등학교와 제주일중을 거쳐 제주일고를 다녔다.


그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기 보다는 잘 놀고 운동을 잘했던 친구로 동문들 사이에서 기억되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고교 시절 운동을 잘했던 탓에 체육 선생님으로부터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진학을 권유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의대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 때부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체육 선생님의 배려로 일요일마다 학교의 총각 선생님들로부터 국어, 영어, 수학을 무료로 지도를 받았고 그 덕택에 무난히 한양대 의대에 합격했다.

 

▲마당발 인생을 살다

양 대표가 한양대 의대를 다니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는 유신헌법 등으로 사회적 격변기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기에는 그의 성격과 기질이 용납하지 않았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학내 문제와 학우들의 복지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에 관여했다.


또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제주출신 대학생 모임인 재경제주학우회 회장을 맡아 서로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재경제주학우회와 제주대총학생회가 함께 봉사하는 연합학우회를 만들어 고향 제주의 발전을 고민하면서 그의 마당발 인생이 대학 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한양대 의대를 2회로 졸업했다.


2002년부터 3년간 한양대 의대 동문회장을 맡았고 한양대 총동문회 부회장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다가 2012년 2월에는 제17대 한양대 총동문회장으로 선출됐다.


현재 그는 한양대 총동문회장을 연임하고 있다.


서울도민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2012년 봄 서울제주도민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재외제주도민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가대표 팀 닥터로 유명세를 얻다

양 대표는 1977년 여름에 의사가 되자마자 서귀포에 있는 제주도립병원에 자원해서 내려왔다.
당시 변변한 의료장비조차 없었지만 젊은 청년 의사로서 열정을 다했다.


그 후 1983년 서울 강남에 개인병원을 개업한다.


양 대표는 “정형외과를 개업한 후 처음 진료실을 찾은 환자가 대학 야구팀의 선수였다”고 밝혔다.


그 때 양 대표는 병원을 찾은 야구선수에게 처음 한 말이 “나도 야구 진짜 좋아하는데...”였다고 한다.


그게 시발점이 된 것이다.


운동을 좋아했기에 운동선수들이 병원을 찾아오면 괜히 좋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친밀감을 내비쳤다.


그러자 점점 운동선수들을 잘 챙겨준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박철순, 장효조, 김시진, 유중일, 이만수 선수 등 프로야구 초창기의 대표적 스타들을 비롯 축구, 배구 등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이 찾아오며 마치 스포츠 전문 병원을 방불케 한 것이다.


특히 양 대표의 정성어린 치료로 재기에 성공한 박철순 선수와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고 한다.


이처럼 운동선수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고 마침내 국내 처음으로 1984년에 두산 OB베어스 팀 닥터가 돼 15년 동안 활동했다.


1988년 88 서울올림픽 때는 국가대표 팀 닥터가 됐으며 그 후에도 국가대표 유도.탁구 팀 주치의로 명성을 쌓아갔다.

 

▲ 양원찬 대표(사진 원쪽서 첫 번째)가 2011년 제주 세계 7대 자연경관 범국민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할 당시 모습.

▲김만덕 기념사업회에 헌신하다

김만덕 기념사업회는 1971년 10월 23일 처음 설립됐다가 1977년 김만덕 묘 이전 사업을 끝으로 해체됐다가 2000년 9월 25일 재발족됐다.


그리고 2004년 3월 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하면서 명실상부한 기념사업회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때 양 대표는 김만덕 기념사업회의 실행위원장을 맡으며 실무 전반을 책임졌다.


기념사업회 첫 사업으로 ‘의녀 김만덕 활약상 자료 조사 연구’를 간행하고 2005년에는 국회에서 열린 화폐 도안 인물 관련토론회를 주도하며 새로 발행되는 5만원권 화폐에 김만덕 초상을 넣는 일을 추진했다.


안타깝게도 5만원권 화폐의 초상은 전국적인 인지도 등의 이유로 신사임당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 정신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2007년에는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김만덕 나눔 쌀 천 섬 쌓기 운동’을 전개했다.


2009년 10월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만덕 나눔 쌀 만 섬 쌓기’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당시 모인 쌀은 2만2000섬(440t), 기부금품 액수는 28억4000만원에 달했다.


김만덕 서거 200주년을 맞은 2012년에도 다시 한 번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만덕 나눔 쌀 만 섬 쌓기 운동’을 벌였다.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 정신을 세계화하는 사업도 추진했다.


베트남에 칸오아 제주초등학교와 번푸 만덕중학교를 건립한 것이다.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에 ‘올인’

양원찬 대표는 2010년 8월 당시 우근민 제주특별자치도지사로부터 부탁을 받는다.


“중앙 무대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경험을 살려 세계 7대 자연경관 범국민조직위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곧바로 범국민위원회 구성에 들어간 그는 정운찬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사무총장을 맡아 범국민조직위를 출범시켰다.


제주출신 고두심씨를 홍보단장으로 하고 자오즈민, 박지성, 추성훈, 최경주, 김태희, 윤도현, 양용은을 비롯해 100여 명에 가까운 국내.외 유명인사들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마침내 범국민위가 출범한 지 한 달 후인 2011년 1월 13일 제주도의 세계 7대 자연경관 도전 선포식을 갖게 된다.


세계 7대 자연경관 최종 선정일을 300일 남겨 둔 시점이었다.


이날 선포식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투표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대통령 영부인인 김윤옥 여사는 범국민위 명예위원장을 맡아 힘을 실어줬다.


양 대표는 “범국민위 사무총장을 하면서 30년 동안 운영하던 병원 일에서도 완전히 손을 떼야 할 만큼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술회했다.


드디어 2011년 11월 12일 새벽 3시, 제주는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됐다.


한 중앙언론은 ‘제주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의 숨은 주역 양원찬 사무총장’이라는 기사를 게재할 만큼 양 대표의 노고를 치켜세웠다.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운동과 관련, 양 대표는 “범도민위의 호소와 부탁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 공무원들을 경쟁시키다시피 전화투표가 이뤄지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고 관권 동원의 부작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며 “결코 그것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고 아쉬움도 털어놨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양원찬 대표는 사람 좋아하고 오지랖 넓은 자신과 20년을 함께 했던 부인이 곁을 떠났을 때 “나와 함께 산 세월이 아내에겐 고통이었구나”하고 느꼈다고 한다.


“현재 부부로서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그 역할에는 충실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 대표는 1남 2녀의 아버지다. 이 가운데 아들은 유명 레퍼인 ‘타이푼’이다.


처음에는 아들이 공부는 않고 음악만 하는 것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을 인정하고 응원한다.


“뮤지션이라고 폼이나 잡으며 게으르게 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쏟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막내딸 결혼식은 직계 가족과 신랑.신부의 친구들만 초청해 조촐한 작은 결혼식을 올려 주위에 잔잔한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고향 제주에 대한 단상

양 대표는 항상 “제주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한 “제주는 제주 자체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2014년 6.4 지방선거에 새누리당 제주특별자치도지사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원희룡 현 지사가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그는 "원희룡 후보를 통해 21세기에 도전하는 담대한 도민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겠다"며 후보를 사퇴했다.


양 대표는 자신에게 마지막 소명이 있다면 “제주를 세계의 무대에 올리고 제주 자체를 잘 보전하는 일”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는 제주의 청년들에게는 “발은 제주도에 있지만 시선을 세계를 향하라”고 당부했다.


“세상을 다 품겠다는 꿈을 꿔 달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안재형-자오즈민 핑퐁커플의 국경넘은 사랑 맺어준 '큐피트'

양원찬 대표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안재형 선수와 자오즈민 선수의 국경을 뛰어 넘은 세계적 러브 스토리다.


한국 남자 탁구의 국가대표 안재형과 중국 여자탁구 국가대표 자오즈민 선수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양 대표의 헌신적 지원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 대표의 얘기를 빌리자면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처음 본 건 1984년 10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에서다.


그 때 서로 한 눈에 반했는데 자오즈민이 한국인 중국 교포를 통해 편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 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고 결혼을 결심하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 한국과 중국은 미수교국으로 서로 왕래나 연락조차 힘들 때였다.


오히려 중국 측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 등의 언론을 통해 계속 보도되자 매우 불편해 했다고 한다.


이 때 나선 것이 양 대표다.


그는 1987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컵 탁구대회 때 자오즈민과 안재형 선수 어머니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 때는 양 대표가 국내.외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 그의 병원 4층 입원실을 전부 비워 놓고 안재형 선수의 부모와 자오즈민이 만날 수 있도록 했고 이 때 두 사람의 결혼 시나리오도 양 대표가 마련했다고 한다.


그 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하고 은밀한 움직임 끝에 1989년 10월 18일 스웨덴 한국대사관에서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결혼신고서에 사인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의 세기의 사랑은 1989년 12월 29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양가 가족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한국식 전통 혼례를 올림으로써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다.


이 때의 인연으로 안재형.자오즈민 부부는 양 대표와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자오즈민이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때 제주도 홍보대사로 중국에서 많은 활동을 한 것도 이러한 인연이 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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