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유학의 전당에서 중등교육 꾳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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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림서당, 사액서원으로 지정 유교문화 부흥
▲ 1910년대 도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제주농업학교가 귤림서원 터에 자리한 모습. 1922년 당대 최고 수준인 신교사 1동이 신축됐고, 1927년 기숙사에 이어 1933년에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귤림서원(橘林書院)은 조선시대 유학의 전당으로, 근현대에는 제주 최초의 중등교육을 태동시킨 교학의 터전이다.

1578년 제주판관 조인후가 유배를 왔다가 생을 마감한 김정을 봉향하기 위해 산지천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세운 것이 귤림서원의 시초다.

김정(1486~1521)은 조광조와 함께 정치 개혁을 펼치려다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됐다. 왕의 자진 명령에 따라 사약을 받고 36세 나이에 목숨을 끓었다.

1660년 제주목사 이괴는 지금의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북쪽에 장수당(藏修堂) 학사를 지었고, 유생 35명을 수용해 사서삼경을 익히게 했다.

이 목사는 초하루와 보름에 직접 강연을 하면서 향교의 선비들도 참석하게 됐다.

장수당은 춘궁기 백성에게 빌려주는 환곡에 대한 모곡(이자로 받는 곡식) 일부를 학생들의 식량으로 제공했다.

콩·밭벼·목면도 지급했다. 또 배 한 척을 지정해 육지에서 장사를 하게 하면서 운영 경비를 조달했다.

1667년 제주판관 최진남이 가락천에 있던 김정의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면서 사(祠·제사 기능)와 재(齋·교학 기능)를 갖춘 명실상부한 서원이 세워지게 됐다. 이때부터 귤림서원이라 불리게 됐다.

1682년 숙종은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로 보내 귤림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정하고 편액(현판)을 하사했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를 하사받는 등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사액서원이 되면서 김정 외에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했다. 1696년에는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오현(五賢)을 배향하게 됐다.

 

▲ 1910년대 귤림서원 터와 오현단이 제주농업학교 교정으로 바뀐 가운데 학생들과 지역 유지들이 참석해 일본식 신제를 올리고 있다.

귤림서원은 본사인 오현사와 영혜사, 향연사 등 2개의 별사로 구성됐고, 유생들이 공부를 하는 장수당으로 구성됐다.

흥선대원군은 집정 초기부터 서원을 국가 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근원으로 보고 1871년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됐다.

서원 철폐령으로 200년 넘게 유학 및 유교문화의 전통을 계승해왔던 귤림서원도 사라지게 됐다.

1892년 제주 유생 김희정이 중심이 돼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 선생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조두석(俎豆石·제단석)을 쌓아 제사를 지내면서 오늘날 유적으로 남게 됐다.

1907년 제주군수 윤원구는 귤림서원 터에 도내 최초로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義信學校)를 설립했다.

1909년 공립제주농림학교, 1911년 제주공립농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현 제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제주농업학교는 중등교육 및 실업교육의 본산이자 시초가 됐다.

1940년 5년제로 승격한 제주농업학교는 오현단 부지에서 현 삼성초등학교로 교사를 이전했다. 삼도1동 벚꽃 길은 제주농업학교가 있었던 자리여서 ‘전농로’라 불리고 있다.

귤림서원과 오현단 일대에는 1946년 오현중학교, 1951년 오현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오현중·고교는 1972년 화북동 별도봉 기슭으로 옮기면서 오현단 일대 학교 부지는 민간에 불하됐다.

학문 연구와 배움의 근간이 됐던 귤림서원 터에는 제주고와 오현고가 차례로 들어서면서 제주교육의 부흥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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