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비들이 존경했던 오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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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서 제례 지내...일각에선 서인의 정치활동 확대
▲ 1892년 제주 유생 김희정 등이 송시열, 김정, 정온, 송인수, 김상헌 등 오현 선생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조두석.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은 헐리게 됐지만 선현들을 배향하기 위한 오현단은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도내 유생들의 흠모했던 인물이 오현(五賢) 선생이다. 송시열, 김정, 정온 등 3명은 유배인이다. 여기에 1534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송인수, 1601년 안무사로 온 김상헌이 포함됐다.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오현단은 1971년 지방문화재(도기념물) 1호로 지정됐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서인(노론)의 영수인 송시열(1607~1689)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경종)의 왕세자 책봉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83세 고령임에도 제주에 유배를 왔다. 귀양 생활은 100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림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추사 김정희는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최익현은 시와 편지, 상소문에 송시열을 자주 거론했다.

1771년 양세현 목사는 제주성내 산지목골에 송시열의 자취를 기리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비석은 1977년 오현단으로 옮겨졌다.

오현단 내 암벽에 새겨진 ‘증주벽립(增朱壁立)’은 중국의 대학자인 증자와 주자가 쌍벽으로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증자와 주자를 공경하고 배운다’는 뜻으로 송시열의 글씨다. 1856년 채동건 목사와 홍경섭 판관은 이를 탁본해 바위에 새겨 놓았다.

제주시는 2004년 6억원을 들여 오현단 경내 877㎡ 부지에 귤림서원을 복원했다. 서원은 사당 1동, 강당 1동, 협문 1동, 담장(110m)이 조성됐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충암 김정만 배향됐던 서원에 당쟁이 가장 심했던 숙종 때에 송시열과 송인수 등 오현을 모신 것은 서인 정권기에 이뤄진 정치적 역학관계로 풀이하고 있다.

귤림서원은 서인(노론) 세력이 변방인 제주로 세력 확대를 꾀하며 설치한 정치공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실례로 오현 선생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송시열과 송인수 3개월(100일), 김상헌 4개월, 김정 1년 3개월, 정온 8년 6개월 등 정온을 제외하면 시간적으로 짧았다.

특히 송인수는 제주에 오는 것을 꺼려해 1534년 3월 목사로 부임했지만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3개월 만에 제주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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