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지와 비익조
연리지와 비익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방영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관광영어학과/ 논설위원

한라생태숲에 가면 연리목(連理木)이 있는데, 두 그루의 나무가 뿌리에서 이어지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 뻗어가던 가지가 교차점에서 만나 같은 나무처럼 되면 연리지(連理枝)라 부른다.

특히 연리지는 남녀 간의 사랑과 부부애를 나타내는 비유로 쓰인다.

다들 알다시피 연리지를 언급한 대표적인 예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다룬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시 ‘장한가(長恨歌)’일 것이다.

양귀비를 그리는 현종을 위해 한 도사가 선계로 양귀비를 찾아가 만나고, 그녀가 현종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끝 부분에 나온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한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백거이는 양귀비가 죽은 지 거의 20년 쯤 후, 현종이 죽은 지는 1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안녹산의 난으로 곤경에 처한 현종이 피난길에서 부하들의 강요를 못 이겨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했다. 이런 역사에 시인은 그들의 한을 유추하면서 상상을 펼쳤을 것이다.

비익조는 날개가 한쪽뿐인 새이며, 짝을 만나서 두 날개가 되어야 날 수 있는 전설의 새이다. 연리지와 비익조의 개념은 대부분 사람들 꿈의 뿌리를 이루는 것 같다. 부모의 눈으로 보면 자녀들이야말로 연리지, 연리근, 연리목일 것이다. 애국지사들은 이런 개념을 확산시켜 고향 친지와 온 나라 백성까지 적용시키는 탁월한 능력과 안목을 지녔던 위인들일 것 같다.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는 배경도 연리의 개념에 이끌린 소치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지극한 애정으로 이어져서 한 몸을 이루어 새 삶을 시작한다고 결혼한다. 또한 우리에게는 혼자 살면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 듯이 항상 막연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휩싸이는 경향이 있다. 마치 날개가 한쪽밖에 없어서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비익조처럼 느끼는 것이다. 짝을 만나면 완성되어 무한히 비상하면서 자유와 희열을 누리게 되리라는 기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네 것 내 것 없이 연리지처럼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했지만 바람 불 때마다 맞닿은 가지는 쓰라리고 아프다. 오랜 세월 유지하기 쉬운 상황이 아니다. 해결할 방법을 모른 채 생나무 줄기를 서로 싹둑 잘라내는 식의 선택도 한다. 연리지의 꿈이 잘려서 사라지면 한 때의 희망은 피 흘리며 죽어간 과거가 된다,

꿈이 실현되어 제대로 짝을 찾았다고 믿는 비익조들도 환희에 들떠서 날아오르려고 하면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가 서로 맞지 않는다. 연습을 거듭해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심성과 육신은 믿고 의지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변하기 쉽다. 거기에 극단적 개인위주가 겹치면서 삶의 뿌리가 더욱 약해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북미대륙의 원주민들은 사람이 각자 혼자인 듯해도 실제로는 거미줄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의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이 흔들리면 전체 존재들의 망이 흔들리고 손상되므로, 연결선 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돌봐야 한다. 유럽에서 온 백인들은 이런 노력을 실천하려고 애쓰던 그들을 말살하려고 시도했다.

만일 우리가 인식의 울타리를 확산시켜서 연리지와 비익조의 꿈을 적용한다면 삶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이 자국에 부족한 날개를 옆 나라에서 빌려오고, 또 보유하고 있는 날개를 빌려주기도 한다면 비생산적인 일로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또 인류 전체가 같은 살을 지닌 한 몸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되면,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과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남는 것과 부족한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조화를 이루고, 지구를 알뜰하게 운영하면서 공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