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주인들은 ‘북두칠성’의 후예였다
(10) 제주인들은 ‘북두칠성’의 후예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제주성안 7곳에 칠성대 건립...결속과 번영 기원
▲ 1900년초 연농 홍종시가 제작한 제주고적도 지도에 칠성대가 있던 위치를 표시한 모습. 빨간 점선 원안이 칠성대가 있었다


옛 제주인들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섬기며 살았다.

칠성대(七星臺) 또는 칠성도(七星圖)는 고대 탐라국시대부터 내려온 최고(最古)의 유적으로 탐라사회의 결속과 번영을 기원했던 상징이었다. 그래서 탐라왕을 성주(星主)라고 지칭했다.

조선시대 제주시의 또 다른 명칭은 칠성대촌(七星大村)이었고, 현재 ‘제주의 명동’이라 불리는 칠성로, 칠성통 등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칠성대는 제주성안 일곱 곳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흩어져 있었고, 돌이나 흙으로 쌓은 제단이었다. 칠성대를 확인할 수 있는 고문헌은 20종에 이른다.

최초로 기록한 문헌은 1530년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칠성도는 주성 안에 있고,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이 각각 일도, 이도, 삼도로 나누어 차지한 후, 북두칠성 모양을 본 떠 대(臺)를 쌓아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기록했다.

김정 제주목사가 쓴 노봉문집(1736년)에는 칠성도를 수축하라는 제목으로 “칠성도는 성안에 흩어져 있는데 모두 돌이나 흙으로 쌓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면서 그 터를 알 수 있을 뿐이기에 수축하도록 명하였다”고 기록했다.

▲ 북두칠성 7번째 별인 칠성대 요광성있던 자리에 표지석이 설치된 모습. 제주시 산지천 서쪽에 들어서 있다.

시·서·화에 능했고, 제주향교의 도훈장이자 1931년 초대 제주읍장을 지낸 연농 홍종시(1857~1936)가 1900년 초에 제작한 제주고적도에는 칠성대가 있었던 위치를 표시했다.

점선의 길쭉한 원으로 그려진 위치도는 북두칠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앞서 제작된 제주읍성도 지도에는 칠성대의 위치에 상관없이 한 군데에 모아 그렸지만 홍종시의 지도는 해당 위치에 표시했다.

구한말 제주의 석학 심재 김석익(1885~1956)은 저서 파한록에서 “삼을나가 개국할 때 삼도로 나누어 거처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쌓았다고 한다. 대의 터는 지금도 질서정연하게 남아 있다. 향교전, 향후동, 외전동, 두목동에 있는데 세 개는 모두 칠성동에 있다”며 김정 목사가 수축한 이래 전래되던 칠성대의 장소를 서술했다.

제주의 교육·민속·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만농 홍정표(1907-1991)는 탐라사에 관한 기고에서 “북두칠성에 대한 봉제의 제단으로 삼을나의 추장이 중심이 되어 제를 지냈는데 각 부족이 번영과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칠성대를 설명했다.

 

▲ 제주시 칠성로에 북두칠성 별자리를 형상화한 길 안내 표지판. 탐라국은 북두칠성을 섬긴 ‘별의 나라’였다.

고대로부터 북두칠성은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관장했다. 무속인들이 “칠성님께 명을 빈다”며 치성을 드리는 이유다. 제주지역은 칠성신을 뱀으로 상징하고, 집의 재물신으로 모시는 독특한 무속신앙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성인이 되면 이마 위에 상투를 올리는 데 상투는 한자어 상두(上斗)에서 나온 말로, 상두는 북두칠성(北斗)을 뜻한다. 상투를 틀 때 앞으로 4번, 뒤로 3번 꼬면서 항상 북두칠성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을 지고 다시 칠성별로 돌아간다고 하고 있다.

일제시대 칠성대가 있던 곳에 가옥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돌로 쌓은 제단은 평지로 변하면서 흔적이 지워졌다.

제주시는 2011년 고문헌과 자료, 위치 고증을 거쳐 칠성대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7곳에 안내 표지석을 설치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