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나 전철을 타본 사람이면, 누구나 보아서 알고 있을 것이다. 버스 차내에는 2~3개의 자리 옆에 ‘노약자석’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고, 전철의 한 칸의 양끝에는 노약자·장애자·임산부·어린이를 동반한 사람 등이 앉게 되어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전철의 경우는 그 좌석에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은 별로 볼 수 없다. 어쩌다 젊은이가 앉아 있는 것은 그것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거나, 임산부인 것이 보통이다. 자리가 비어서 앉아있다가도 노인이 승차하면 얼른 일어선다.
그러나 버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노약자’ 표지가 붙은 좌석에 젊은 사람이 앉아 있기가 일쑤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승차해도 양보하여 주는 경우는 적다. 전철에는 없으나 버스는 나이든 사람, 장애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권유하는 방송이 주기적으로 행하여진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못 한다. 따라서 나이가 들고서도 버스나 전철을 이용한다.
직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수히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소유의 차나 직장통근버스로 출·퇴근 기타 이동을 할 것이다. 이렇게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양보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거나 승차행태를 잘 모를지도 모른다.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나는 아주 심각하게 느낄 때가 있다. 특히 70이 넘어서 또 몸이 불편 시에는 버스에 승차하면 누가 양보해주지 않나 하고 은근히 기대를 한다. 젊은이가 노약자석에 앉아 양보를 안 해주면, 어디 아픈가를 물어보고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권유하여 자리에 앉는다.
내가 정년퇴직하기 전에는 주로 사당동에서 수원서 더 들어가 있는 학교까지 출·퇴근용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가 서울 북쪽에서 오기 때문에 사당동에 왔을 때는 이미 자리가 없다. 그러나 내가 교수라는 것을 아는 젊은 교수나 직원·조교는 자리를 양보해준다. 그런데 양보를 해주면 고맙기는 하나,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어쩌다 양보를 안 해주면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괘씸한 생각이 든다. 이상 말한 두 가지의 감정상 부담 때문에 재직 중에는 영등포로 가서 기차를 타고, 수원에서 내려서 학교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나이가 70대 중반이고 보니 버스와 전철을 많이 이용하게 된다. 전철의 경우는 경로석에 이미 노인들이 앉아 자리가 없으면, 앉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버스를 탔을 때 노약자석에 젊은이가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바라 본 바에 의하면, 노인이 탔는데도 양보를 안 해주는 사람이 과반수 가까이 된다. 눈을 감고 있는 젊은이도 있다. 그 노인네도 당연하다는 듯 그 옆에 서 있다.
실로 불쾌한 일이다.
‘제 나이 자기가 먹었다’는 듯 노인이 무슨 특권의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버스에 써 붙인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것은 공중도덕을 지키는 것의 일종이다.
나는 승차 시 즉시 자리를 양보해주는 젊은이를 보면, 저런 젊은이는 타 사회 생활도 모범적으로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가정·학교에서 잘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철의 경우, 노약자석 등에 젊은이가 앉지 않는 것은 그 승차가 무료이고 노인들이 많이 타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는 유료이고, 노인들이 덜 이용하는 교통수단이고 보니 좌석문화의 발달이 미흡한 것 같다.
전철에 승차하였을 때 거의 같이 늙어가는 연령대의 사람이나 몇 살 더 먹었다고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버스에서 노인·장애자에게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형식적인 방송만 할 것이 아니라, 운전기사 등이 직접 양보를 호소하는 등 그 표지대로 실질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바란다.
송희성 현대법률연구소장 前수원대 법대학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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