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와 제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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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논설위원

우리에게 감저(甘藷)로 익숙한 고구마는 조선후기 문신 조엄이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에 들러 그 종자를 얻어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심게 한 데에서 유래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지역 서민들의 주식(主食)은 고구마였다. 고구마는 곡물식량 대체는 물론 절량기(絶糧期) 구황(救荒) 작물이었다. 제주지역 기후풍토가 고구마 재배에 적합하며 대용식량은 물론 주정(酒精), 전분(澱粉)의 원료로 판매할 수 도 있어 제주지역 농민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작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농작물과 달리 태풍의 피해를 덜 입는 식량작물로서 기여하는 바가 컸다.

제주지역에 고구마 재배가 급격히 확산된 것은 1930년대라고 보여진다. 물론 그 이전에도 꾸준히 재배는 이루어져 왔으나 1930년대 일제의 증산정책과 수매로 빠르게 재배가 확대되었으며 당시 농가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제의 고구마 증산정책은 결국 주정원료인 전분 공출을 늘려 군수물자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제주도에 일제히 감저 재배에 착수, 무수주정(無水酒精) 원료 이십 여 만 제주도민의 생명원(生命源)”(동아일보, 1938년 7월 1일)

“보조금 십오만 원 교부 감저 증산을 단행! 공업적으론 물론 영양가(榮養價)로도 유리, 제주도산으로 종저(種藷)는 충분”(동아일보, 1938년 12월 6일)

고구마는 일제강점기 제주농업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이전까지만 해도 식량확보를 위한 주곡작물 위주의 단작농업에서 고구마로 식량이 대체할 수 있음에 따라 재배작물의 다각화가 이루어 졌고 현금을 얻을 수 있는 상품작물의 재배가 확대되었다. 또한 고구마는 타 작물에 비해 태풍피해가 적고 노동력 투하량도 적은 면이어서 재배 가능 면적이 늘어나 일종의 ‘광작(廣作)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작년에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가 제주를 방문했었다. 고구마의 이동과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고구마 원산지에서 출발하여 제주도를 거쳐 부산 등지에서 고구마 재배의 유래와 역사, 농업사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의미를 현장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즉, 고구마를 단순히 재배작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구마에 얽힌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일종의 구술사적 방법으로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정어리’를 주제로 조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갈 때마다 보고 느끼지만, 일본은 지역마다, 심지어 마을단위에서도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이를 아카이브 박물관에 전시하여 후대들에게 이를 전하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특히 중앙정치사가 아닌 마을생활사, 미시사(微時史)가 아주 발달해 있다. 민족감정을 떠나 부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제주지역에서도 ‘제주학센터’의 기능이 점차 활성화됨에 따라 센터를 중심으로 제주사 정립을 위한 노력들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화석화된 역사가 아니라 문화가 결부된 살아있는 우리의 역사, ‘탐라공정’을 발굴하고 기록하며 이를 아카이브화하는 의미있는 연구들이 내실있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공식적인 연성자료(soft data)를 발굴?축적하는 일이다.

대체로 공식 문건 이외에 당시 상황 파악, 특히 밑에서 부터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각종 형태의 자료를 연성 데이타라 할 수 있다. 공식자료를 통한 당시 모습의 간접적인 재생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현실감 있게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연성 데이타를 간과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구술(口述) 등의 방법을 통해 고구마, 정어리, 감태, 우뭇가사리 등에 대한 연성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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