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의미래를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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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어린 시절의 10여 년을 외가인 함덕에서 살았다. 비석거리에서 신흥 쪽으로 가다가 길가 오른편의 큰 상점이 우리 집이었고, 외증조할머니께서는 윗동네 큰 집에서 혼자 사셨다. 청주한씨 종가에는 토지가 꽤 있었는데, 상점이나 윗동네 큰 집이나 꽤 많은 밭들을 관리하던 사람은 증조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 밖에 안계셨다. 집안 남자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일본으로 도피해간 것은 4·3사건과도 관련이 있었다.

어머니는 무척 바쁘셨다. 큰 집 아랫집 그리고 밭들을 관리하셨고, 상점도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제주신문(제주신보)에서 글 쓰는 분이셨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신문사 일을 하셨고 토요일에는 함덕의 집으로 오셨다.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끝이 뭉툭한 파카51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시던 모습이다.

아버지는 자주 아프셨다. 심할 때는 입원하셨고, 조금 나을 때는 출근하거나 아니면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아버지의 병은 심장병이라 했다. 중학생 때는 달리기 선수였다는데 왜 그렇게 되셨나 하면 4·3 당시 어떤 충격이 원인이 되었고 이후 신문의 글 때문에 일년 여 도피생활을 했던 것이 병인(病因)이 되었다. 심장병은 불치병이었고, 아버지는 40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정치적 경험 때문인지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큰 아들은 정치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오. 글 쓰는 쪽으로도 가지 못하게 하시오.” 그런데 어려서부터 나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글 쓰는 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유언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 자연계 대학에 들어갔는데,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럭저럭 방황을 시작했고, 10여 년의 방황은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웠다. 방황의 끝자락에서 나는 신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방황은 끝났는가 싶었는데, 보다 깊고 넓은 방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대 이 나라의 신학계는 좌우 갈등이 한창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방황했으니 이제는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옳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20여년 후, 나는 전쟁과 테러의 땅 러시아의 북(北) 카프카스 어느 들판에 세워져 있었다. 러시아 어느 공화국의 인권위원회에 속하여 일할 때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적인 사람처럼 보였고, 그러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료들 중 누군가 나를 중도 우파라 불렀고, 또 누군가는 중도 좌파라고 했다.

청주 한씨 종가의 큰 손녀셨던 어머니는 4·3 시기에 몇 개월 동안 산에 올라가 계셨다. 누군가 한 사람은 산에 올라가야만 집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20대 젊은 시절에 여러 해 경찰 생활을 하셨다. 경찰 한 사람은 있어야 집안이 평안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산으로, 아버지는 경찰. 그래서 두 사람의 아들인 내가 중도 좌파로 보이고 또 중도우파로도 보이는 것인가? 비겁한 생존전략이 아닌 관계와 소통을 위한 거라면 뭐라 불려도 문제될 건 없다. 구태여 입장을 밝힌다면, 어떻게든 공동의 미래를 전제하여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나는 지금 김포공항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비행기가 제주 공항에 착륙할 때 보통은 오른편에서 접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는 왼편 사라봉 쪽에서 접근해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일단 공항에 착륙한 사람들은 서귀포로 갈지 함덕으로 갈지 성산포로 갈지 아니면 서귀포로 갈지, 그런 쪽에 주로 신경을 쓸 것이다. 조금 전에 비행기가 어느 편으로 날아왔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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