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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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회 제주대 교수독일학과/논설위원

우리말 속담에 나오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원래 ‘이미 일을 그르친 뒤에야 깨달아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비꼼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바로 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정치현실에서, 언제 또 귀중한 ‘소’를 잃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참으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한여름 전력수요 급증을 막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문 열고 냉방영업 금지 정책’만 해도 그렇다. 가정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영업용 전력요금 체계를 조금만 손을 보면 될 것임을 정책입안자들이 몰라서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지 ‘외양간 고치기’ 작업소식이 없다. 제주특별자치도의 ‘공유재산 처분’ 문제도 그렇고, 말뿐인 ‘책임행정’ 문제도 그렇고, 일일이 거명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18세기 중엽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 이야기나 해보자.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 근처 해역에서 리히터 규모 9 정도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8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리스본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졌고, 약 90분 뒤에 들이닥친 세 차례의 해일은 리스본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리스본에서만 3만 이상이었고, 에스파냐와 모로코 등에서 사망한 사람까지 합하면 많게는 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15세기와 16세기에 스페인과 더불어 신대륙의 많은 나라를 정복했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이런 대도시가 지진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왕궁도 무너져서 천막에 머물러야 했던 왕은 수도를 옮기자는 신하들과 ‘신의 징벌’이라고 단정하고 회개를 강요하는 성직자들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던 재상 카르발류가 ‘죽은 자를 묻고 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아주 현실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왕은 그에게 재난관리를 맡겼다. 그는 수석도시공학자를 포함한 세 명의 건축기사에게 리스본 재건의 일을 맡겼고, 이들이 제출한 계획안 다섯 가지 중 하나를 선정하여 리스본 재건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그는 왕으로부터 폼발 후작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고, 당시 지진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수행했기에 ‘근대적 재난 피해 조사’를 지칭하는 ‘폼발 조사’라는 고유명사에 그의 이름을 남기는 명예까지 얻게 되었다. 또한 현대의 지진학이론 대부분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고 할 정도로 폼발 후작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폼발 후작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엇갈린다. 진보적인 계몽사상가들에게는 ‘계몽절대주의를 펼친 위대한 정치가’였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얼치기 철학자이며 잔인한 폭군’이었다. 당시 왕의 정책에 반대하던 최고의 두 귀족을 역모혐의로 처형하고, 재건보다는 회개와 기도를 촉구함으로써 복구작업에 걸림돌이 되었던 포르투갈 카톨릭교회의 수장 말라그리다 신부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에 처하는 등, 과감하게 혁신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에 20여 년에 걸친 리스본 재건 사업을 추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폼발 후작은 1777년 왕이 사망하고 왕의 장녀가 즉위하면서 보수정치로 회귀하는 바람에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의 진보적인 조치들이 보수주의자들에겐 크게 거슬렸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모두에게 좋기만 한 것’은 없다. 현실을 직시하여 문제가 있는 부분은 과감하게 뜯어 고치는 ‘외양간 고치기’ 작업의 요란한 소리를 학수고대하는 건 나 한 사람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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