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뭣 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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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영/수필가

단비가 내렸다.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더위도 한풀 꺾이고 계절의 질서에 순응하듯 가을로 접어들었다. 비를 맞은 정원의 감나무도 그 많은 열매를 품에 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만 같다. 우주 자연의 섭리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지난 5월 초,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달포 동안 병원에서 보냈다. 아플 때면 으레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다. 삶이 아무리 버거워도 내색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속내를 예전에는 몰랐었다.

 

j대 병원에서 삼 일째 되는 날. 창문 너머 오름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아픔의 고통 속에서 보는 듯하여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다음날은 ‘하늘 정원’을 산책하다 네잎클로버를 세 개나 주웠다. 이 또한 행운이 아닐까.

 

병실에는 애환 많은 환우로 넘쳤다. 동쪽 마을에 산다는 팔십대 할머니는 고관절 수술로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4·3사건 때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어린 남동생의 손을 잡고 이집 저집 눈칫밥을 먹으며, 때로는 물로 배를 채웠다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슬하에 아홉 남매를 두었으며 딸 하나는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맞은편 침대에 누운 칠십대 후반의 여인, 무릎 수술을 받아 남편이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보물창고라고 했다. 칠남매의 어머니로 해산물을 채취해서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얼마 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우뭇가사리를 망사리 하나 가득 채우면 남편은 그것을 경운기로 운반하는 작업을 했단다. 그녀의 남편은 밤마다 아내의 아픈 다리에 얼음찜질을 해주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아파서 찡그린 환우들을 웃게 해주었다. 덕분에 병실 분위기도 한결 밝았다. 그녀 남편은 간병인보다 아내를 더 잘 보살폈다. “아이고, 아저씨는 간병 도우미 값을 기백만 원도 더 벌어수다예!” 했더니 빙그레 웃었다. 시골 남정네의 소박함이 우리를 더욱 즐겁게 했다. 아내보다 두 살이나 아래지만 부부금슬이 좋아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보름 만에 퇴원을 하고 서귀포 권역재활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집이 가까워서 남편도 오가며 병실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들 며느리가 있어도 끼니 챙기는 것이 수월하지가 않았나 보다. 아마 아내가 없는 자리가 싫었을 것이다. 내 앞 침대에는 육십 대 초반의 여자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었다. 얼굴이 곱상해서 오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일이며 찬을 나누어 먹다보니 자연스레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녀는 스물일곱 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 없이 어린 남매를 키웠다고 했다. 아이들이 가여워 온갖 노력을 다했다며 “사는 게 뭣산디, 나 미장이 일도 다 해수게!”한다. 그녀의 수줍은 미소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다가가 손을 잡아주자 그녀의 눈가에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이슬이 맺혔다. 시멘트에 모래를 섞어 물을 부어가며 땡볕에 그 일을 했다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지금은 딸아이도 결혼해서 외손자도 보았고 아들도 장성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집도 마련하여 이제야 살만 하구나 했는데 교통사고를 당했단다.

 

어린 자식들을 홀로 보듬어야 했던 어머니의 강인함이 오히려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어머니도 그 좁은 어깨에 다섯 남매를 짊어지고 거센 물살을 헤쳐야만 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어머니를 잃은 상처는 50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한 늙은 인디언의 말이 생각난다. “여자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남자들이 어질러 놓은 세상을 정리하고 치울 사람은 여자들뿐이라고.”

 

사는 게 무엇일까. 비를 맞은 감들이 햇빛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고 있다. 앞으로 한두 달 지나면 감나무는 사람과 새들을 불러들여 한바탕 잔치를 벌일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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