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되는 법
애주가 되는 법
  • 제주신보
  • 승인 201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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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환경운동가/수필가

제주에 산다는 건 축복이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휴식과 치유의 섬으로 느긋하게 누릴 아직 초저녁인데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취객이 지나간다. 한길을 활보하며 용감무쌍(?)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기억 속으로 애주가 한 분이 떠오른다.

귤나무를 심고 가꾼 지 3년이 흘렀다. 황금빛 열매 탱글탱글한 게 참 탐스럽다.

첫 수확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땅은 노력한 만큼 대가를 준다고 했는데 그 이상의 기쁨을 풍성한 열매로 돌려줬다.

옆집 제삿날이다. 넉넉하게 귤을 바구니에 담아 가져다 드렸다. 옆집 할아버지는 귀한 과일을 줘서 고맙다며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눈에 띄게 왜소한 키에 나지막한 음성이 정감이 가는 할아버지다.

밤이 되자 소주 한 되를 들고 아버지와 함께 다시 제삿집엘 갔다. 할아버지, 귤도 고마운데 제주까지 사 왔냐며 굽은 허리를 펴 가며 맞아준다. 제사상에는 내가 공들여 키운 귤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보기에 흐뭇했다.

상외떡을 먹으며 자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조용한 어조로 담소를 나누는 어른들에게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것만도 값지다.

제를 지내고 나자 음복하라며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내왔다. 여럿이 둘러앉아 음복했다.

할아버지는 소주를 맛있게 드신다. 눈이 조금씩 붉게 충혈되고 혀가 꼬부라져 말이 어눌할 정도로 기분 좋게 취하는 것 같았다.

귤을 드시라고 권했더니 손을 젓는다. 귤을 먹으면 아까운 술기운이 달아나 버린단다.

비타민C가 들어가면 술이 빨리 깬다는 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드신 소주의 취기가 오래갔으면 하고 바라는 듯했다.

할아버지를 유심히 살폈다. 술잔을 받을 때도 연신 머리를 수그리며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예를 표한다.

잔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조금씩 아껴가며 마시는 모습은 마치 귀한 약이라도 먹는 듯했다.

술잔을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엔 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는 자주 술을 드셨지만, 과음하지도 않을뿐더러 말 한마디 실수도 않는 분이다. 술이 몸에 밴 애주가다.

가까운 친구 하나는 술만 마시면 주사를 한다. 자잘한 실수이긴 하나 아침이면 미안하다는 전화를 받는다.

또 건넛집 후배 하나는 술만 마시면 행패 부린다. 깊은 밤 동네 사람들 잠을 못 자게 하는 바람에 손목을 비틀어 잡고 집으로 데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음날 모든 것을 술 탓으로 돌리며 사과하면 모두 용서했다. 술은 참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술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생활문화 속에 녹아들었다.

풍류를 알고 문학과 예술을 알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나이 지학(志學)에 이르면 상투를 틀고 얼굴을 모로 돌려가며 어른이 주는 술을 받았다.

혼인할 때도 술이 있었다. 관계례 때도 성인이 됨을 축하하며 주례는 술잔을 내렸다.

친구, 선·후배 사이는 물론 스승을 만나 뵐 때도 늘 함께하는 게 술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뒷집 할아버지처럼 점잖게 술을 대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술 문화가 더욱 건전해질 텐데….

곧 추석이다. 이번 추석엔 일가가 모인 자리에서 주법에 대해 한마디 곁들이며 상하 간 잔을 주고받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