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 고딕풍으로 건립된 중앙성당은 제주성안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랜드마크가 됐다.

▲프랑스 사제들 성당 건립=제주 최초의 성전인 제주중앙성당은 1899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프랑스 선교사 페네(Pyenet) 주임신부와 김원영 보좌신부를 파견하면서 설치됐다.

이들은 제주읍 남문에서 가까운 한짓골에 초가 9칸을 1550냥에 사들여 성당 건물로 삼고 전교를 시작했다.

세도가들이 살던 한짓골은 남문에서 관덕정을 잇는 큰 길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한질’ 또는 ‘한길’은 큰 길을 뜻하는 제주방언이다.

1900년 2대 신부로 부임한 마르셀 라크루는 초가 성당을 기와집으로 개조했다.

한말 제주에 파견된 경성교구 소속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들이 성당을 건립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서 1년 만에 교세가 확장됐다.

1901년 신축교난(이재수의 난)이 발생하기 전 세례를 받아 입교한 신자는 242명, 예비신자도 700명을 헤아렸다.

농촌의 중심 마을에도 공소를 둘 정도였다. 이 때 제주도 인구는 4만여 명으로 도민 40명 중 1명이 천주교 신자인 셈이었다.

   
▲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일환으로 2000년 신축된 중앙성당 전경.

1930년 중앙성당은 지금의 자리에서 고딕식 붉은 벽돌로 신축됐다.

당시 7000원을 들여 건물면적 430㎡(130평)의 신식 성전이 건립했다. 고딕풍의 성당은 제주성안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랜드마크가 됐다.

성당 종탑에는 프랑스제 서양식 성종을 매달아 매일 타종했으나 일제가 전쟁 물자로 공출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토마스 신부 등 외국인 성직자와 신도 10여 명이 간첩 혐의로 체포돼 1945년 광복 전까지 옥살이를 했다.

일제는 성당을 점거해 육군 야전병원으로, 사제관 등 부속건물은 일본군 장교 숙소로 이용했다. 이로 인해 포교 활동이 중단됐다.

광복 후 성당 재건 운동이 본격화됐으나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면서 전교와 신앙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1999년 제주지역 가톨릭 신자 수는 5만761명으로 인구 대비 10%에 이르는 등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교세는 확장됐다.

 

   
▲ 성내교회가 들어선 출신청 건물 앞에서 제주 최초의 선교사 이기풍(왼쪽)과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 이승훈(오른쪽)이 1911년 찍은 기념사진.

▲조선인이 기독교 전래=제주 최초의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1865~1942)는 1908년 입도했다. 그는 조선인 최초의 7인의 목사 중 한 명이다.

산지천변 산지목골 안쪽의 초가 6칸을 매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하다 제주에 유배를 온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헌금 100원을 내놓자 이 돈으로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 맞은편 출신청 건물을 매입해 1901년 성내교회를 열었다.

출신청(出身廳)은 조선시대 병사들이 활을 쏘고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청이었다. 나중에는 무과 급제자들이 근무하는 관아로 사용됐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 1호 교회인 성내교회를 설립하는 등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2년 뒤인 1912년 교인은 410명에 예배당 3곳, 기도처소 5곳에 이르는 등 교세가 확장됐다.

평양 출신인 이기풍은 제주에서 13년간 사역하면서 성내교회를 중심으로 금성·삼양·성읍·조천·모슬포·한림·용수·세화 교회를 개척해 제주 선교의 기초를 다졌다.

   
▲ 제주 최초의 기독교 교회이자 1974년 신축한 성내교회 전경.

칠순의 노구에도 전도를 하던 그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 결과 1938년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42년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측 대표인 이승훈(1864~1930)은 1911년 일제에 의해 최초로 유배를 온 인물이다.

6개월 동안 조천읍에서 유배생활을 그는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이 되면서 500년 동안 이어온 유배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승훈은 성내교회에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등 짧은 유배기간에도 제주에서 신앙 활동과 교육사업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