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교인과 양민이 관덕정 광장 앞에서 처형당한 모습. 그 해 6월 도착한 관군 등이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다.

 

1887년 한불수교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났지만 전국에서 천주교인과 비신앙인들 사이에 300여 건의 교안(敎案:종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중 가장 큰 충돌이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이재수의 난(신축교안)이다.

평안도 출신으로 봉세관(封稅官)으로 부임한 강봉헌은 온갖 잡세를 징수했고, 이런 일에 천주교인들을 채용했다.

여기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던 프랑스 신부를 등에 업은 일부 교인들은 민간인들에게 무리한 행패를 부렸다.

또 교회 부지를 매입하면서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없애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이런 가운데 1901년 2월 대정읍 인성리에서 천주교를 배척하던 오신락이 교회당에서 매를 맞아 숨을 거뒀다.

이에 맞서 채구석 대정군수가 조직한 비밀결사 상무사는 봉세관과 결탁해 백성을 괴롭히는 천주교인들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열면서 무장 봉기가 촉발했다.

관노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무장을 한 후 서진과 동진으로 나눠 제주성에 입성, 교인과 양민 등 700여 명을 처형했다.

민란 소식을 접한 고종황제는 세금 징수와 교회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하고, 찰리사 황기연을 파견했다.

민군은 해산됐고 주동자인 이재수·강우백·오대현 3명은 자수를 했지만 교수형에 처해졌다.

관덕정에서 피살된 교인들은 별도봉 기슭에 버려졌다. 1903년 라크루 신부와 프랑스 공사의 요청으로 홍종수 제주목사는 황사평에 이장 부지를 제공했다.

이재수의 난 이후 천주교는 교세 확장이 위축되는 등 아픔을 겪었다.

서양 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시기에 목회 활동을 하던 이기풍 목사는 몰매를 맞거나 끼니를 굶는 등 숱한 고생을 했다.

반면 일제 강점기 제주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는 증산교 계통의 선도교(仙道敎)였다.

1914년 전파된 선도교는 갓과 도포 등 전통 복장을 고집하고, 천주교와 기독교, 서양인을 배척하면서 무속신앙을 숭배하던 양민들과 서양 종교에 부정적이었던 유림들이 많이 입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