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사는 여자들이 강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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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성. 재 뉴질랜드 언론인

몇 십 년 전 일이다. 미국 신문에 난 제주 해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미국인 기자가 현지 취재를 해서 쓴 기사였다. 백사장에서 일광욕 하는 여자들만 보아오던 기자의 눈에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자맥질 하는 제주 여자들의 모습은 경이로웠을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오래돼 가물가물하지만 한 가지는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제주 여자들이 그토록 힘든 일을 하게 된 배경에 관한 설명 부분이다. 누군가의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뿌리는 유배 역사에서 찾고 있었다. 왕에게 찍혀 혼자 섬에 갇힌 유배객들이 귀양생활에 지쳐 현지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생기면서 여자들의 힘든 노동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글만 읽던 양반들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보니 여자들이 생업을 떠안아 밭일은 물론 바다에까지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대신 남자들은 집에서 애를 보았다. 이런 행태는 부지불식간에 현지인들의 생활에도 가랑비처럼 스며들게 됐다.

그럴 듯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옛날 제주 사람들의 고된 생활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남자들도 열심히 일한다. 여자들이 힘든 노동에 뛰어들게 된 건 일 못하는 남자보다 제주의 환경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혼자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이들도 집안일을 돕는 게 제주의 삶이었다. 제주 해녀는 그런 환경에서 탄생한 직업군인 것이다.

그들은 밭일을 하다가 물때를 보며 바다로 나갔고 봄에 밭에 씨를 부려놓고 물질을 하러 육지로 떠났다. 거듭되는 자맥질로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아파도 이를 악물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자녀들의 학비와 시집갈 밑천이 모두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내뿜는 그들의 숨비소리에서 나왔다.

그게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었고 힘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힘은 바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뿜어져 나왔다. 제주처럼 여자들의 발언권이나 의사결정권이 센 곳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수많은 설화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제주를 상징하는 삼다에 돌, 바람과 더불어 여자가 들어간 것도 단순히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 존재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비슷한 예는 뉴질랜드를 포함한 태평양 섬나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평양 섬나라들도 여자들의 활약상만 보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뉴질랜드는 19세기 말에 세계 최초로 여자들이 참정권을 얻었고 한 때 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권력 삼부를 싹쓸이한 적도 있을 만큼 여권이 신장된 나라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만 기대지 않고 일찍부터 사회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일에서 사실상 남녀구분이 거의 없다. 해녀는 보지 못했지만 대형 트럭을 운전하거나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 여자들도 여럿 보았고 의사와 변호사의 남녀비율은 어느 사이엔가 여자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여자들이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좋은 직업에 대한 열망도 강하다.

사모아에서는 집안의 중심이 여자다.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리고 살림을 꾸려가는 게 여자들이다. 대신 남자들은 힘쓰는 일을 많이 한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 오랫동안 집을 비운 사이 여자들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섬이라는 환경이 여자들을 강하게 키워준 셈이다. 일이 여자들을 당당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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