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대 제주시 칠성로에 들어섰던 박종실 상점 모습. 기모노 복장을 한 종업원들이 물건을 정리하며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 상점의 연간 매출액은 제주 1위였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들어들면서 제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의해 상설 점포가 생겨났다. 칠성로와 원정로(관덕로)는 일제에 의해 개발된 제주 상권의 중심지였다.

일제시대 칠성로에 들어선 일본인 상점은 양품점 5곳, 식당 3곳, 요정 3곳, 여관 4곳, 철물점, 완구점, 식료품점, 주류상, 미곡상 등이 있었다.

일본인이 경영했던 잡화상인 반상점(伴商店)은 해운업과 인쇄업, 목재상까지 겸했다.

조선총독부 하기와라 겐조 과장이 1929년 작성한 제주도생활상태조사에 보면 도내 상설 점포는 232곳이었다.

잡화상이 161곳으로 가장 많았고, 포목상 19곳, 약종상 12곳, 미곡상 8곳, 과자가게 6곳, 목재상 4곳, 양복점 및 철물상 각 3곳 등이 있었다.

일본인의 진출에 자극을 받은 도민들도 상설 점포를 개설했다. 대표적인 가게는 1910년 칠성로에 문을 연 박종실 상점이었다.

박종실(1885~1966)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을을 돌며 성냥·양초·실·바늘·창호지 등을 파는 행상으로 돈을 모았다.

자금을 모은 그는 제주인 최초로 상설 점포인 박종실 상점을 개업했다.

처음에는 식료품과 비단, 솜, 철물류 등 잡화를 취급했고, 일본과의 교역에 중점을 뒀다.

   
▲ 1930년대 일본인이 경영했던 잡화상인 반상점(伴商店)은 인쇄업 등을 겸업해 일제시대 제주의 풍물을 소개하는 엽서를 제작했다.

1931년 발간된 조선실업신용대감에는 박종실 상점의 연간 매출액은 4만3000원(현재 가치 약 40억원)으로 상설 점포 중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제주에는 식량뿐만 아니라 면직물·의류품·기계류 등 모든 생필품을 수입했고, 일본 상인들이 장악했다.

그나마 제주에서 반출됐던 해산물·소가죽·한약재 등 역시 일본 중개인을 거치면서 교역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었다.

제주인으로서 근대 무역을 개척은 박종실은 재산을 현금·부동산·상품으로 분산 투자해 시세 변동에 대비했고, 근면·절약·신용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922년 제주상선주식회사를 설립해 오랜 숙원이던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제주에서 민간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해운회사였다.

   
▲ 1930년대 일본인 츠르카와 구이치가 흑산호를 가공해 판해하던 상점. ‘흑산호 츠르카와 본점’이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다.

제주상선주식회사는 부산, 목포 등 연안 항로는 물론 오사카, 시모노세키 등 일본 항로까지 개설해 도민들의 해외 진출과 물자 수송에 이바지했다.

태평양전쟁이 종반으로 치닫던 1945년 4월 그는 기업 활동을 정리하고, 전남 나주로 이주했다가 광복 직후 귀환했다.

기존 사업체를 정리한 그는 1946년 스탠다드석유회사와 특약점 계약을 맺고, 제주도석유배급조합을 설립해 조합장이 됐다.

1952년 남창석유회사를 운영했고, 1958년에는 철강선인 화양호를 여객선으로 개조해 남창운수사를 설립했다.

잡화류 영역을 벗어나 종합무역상사를 세우며 제주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오는 그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1949년 제주적십자사 초대 지사장에 취임했다.

 

   
▲ 제주의 대표적인 근대 무역인으로 꼽히는 청암 박종실.

1957년 자비를 털어 제주도립도서관을 건립했다. 1965년에는 본인의 호를 딴 경로당인 청암정을 건립해 제주시에 기증했다. 청암정 자리에는 현재 삼도2동 남성마을복지회관이 들어서 있다.

1966년 81세의 일기로 타계하자 관덕정 광장에서 제주도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장남 경훈은 초대 제주도지사, 차남 영훈은 제주도립병원장, 삼남 태훈은 제주남양방송 사장, 4남 충훈은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했다.

사위는 재미공사와 서울대 교수를 지낸 고광림 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