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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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식. 수필가

매년 9월이 오면 인천상륙작전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떠올리곤 하였는데 마침 인천에서 전국걷기대회를 개최한다기에 동참하기 위하여 인천으로 갔다.

이번에 인천에 가면 인천자유공원을 찾아가서 지난 1950년도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를 구해 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참배하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며 계획한 여행이다.

우선 인천에 도착하여 맨 먼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자유공원으로 장군의 동상을 찾아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하여 발발한 우리민족 사상 유례가 없는 동족상잔의 참극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거의 기적적인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에 결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는 7만5000여 명의 병력과 총 261척의 함정을 동원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은 작전함대사령관 도일제독의 기함 마운트메킨리호 함상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본국으로부터의 허가가 떨어지자 한국해병대 제1연대 5000여명을 비롯한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육군 제7사단 및 한국육군 제17연대 등을 이끌고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

한국해병대 5000여명 가운데는 용감무쌍한 제주해병 3·4기생 300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15일 월미도에 기습 상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고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로 진격하고 제7사단은 남진하여 아래 위에서 북한군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래서 고립된 북한군은 산맥을 타고 북으로 도주하게 된다. UN군은 26일 인천을 통해 안전하게 서울로 입성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그 결과로 자유의 승리와 대한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일이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우리 국민들은 1957월 9월 15일에 이 거룩한 지역에 동상을 세웠다.

맥아더 장군과 휘하 용감한 UN군 장병들이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장군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수호한 공적으로 인해 한국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사와 존경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가 기획하고 직접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불리한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한 은인임이 분명하다.

그는 세계 제1, 2차 대전 및 한국전쟁에 참가한 전쟁영웅이다. 그의 동상은 ‘꺼지지 않는 자유의 불꽃’으로 상징한다. 오늘날 우리나라 번영의 은인으로서 그를 기억하고 처절했던 그 당시를 회고하는 일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통일이 안 되고 휴전선에 의해 분단된 상태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이 비극은 언제 걷힐 것인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6·25 전쟁과 통일에 대한 세대 간의 인식차가 커져간다.

그 당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걸고 전쟁에 직접 참가한 선배 세대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지금 국가 안보와 평화 통일을 위하여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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