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해수부 기반 앞장...대한민국 해양강국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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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규 전 차관, 행시 합격 후 30년 공직 헌신...퇴직 후 한국선급 위상 높여

전승규 전 해양수산부 차관(74)은 행정고시(7회) 출신으로 해운과 항만통이다.

 

특별한 연줄도 없이 공직 생활을 30년 가까이 해오며 차관까지 오른 해양 행정의 전문가라는 평가를 얻었다. 재임 기간 제주지방해운항만청장, 마산지방해운항만청장, 동해지방해운항만청장, 울산지방해운항만청장, 부산지방해운항만청장 등 전국 주요 항만을 책임지기도 했다.

 

공직 퇴임 후에는 선박안전검사기관인 한국선급 수장을 맡아 국제선급으로 위상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 주경야독하며 고시 합격의 꿈을 키우다

 

전승규 전 차관은 1942년 제주시 외도1동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 형편에 외도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에 열중했다.

 

제주제일중에 재학 중일 때는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자취를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중3 때 갑자기 집안에 시련이 닥쳐왔다.

 

아버지의 거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아 사업을 하던 큰 형님이 돌아가시는 충격 속에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마음 편하게 학업에만 전념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대학 진학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은행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주상업고등학교 야간교육과정에 입학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수업을 들으면서 힘든 주경야독의 시절을 겪었다.

 

평소 얌전한 성격에 공부도 잘해 친구와 후배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고3 때 야간 교육반 친구들의 지지에 힘입어 직선제로 치러진 학생회장을 맡아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1960년 관덕정에서 대부분 고등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 3·15 부정선거 규탄대회에도 참가, 이승만 정권의 선거부정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낭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교 재학시절 취업 준비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특히 수학선생님이던 김종배 전 서울가정법원장과의 만남은 고시 합격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김 전 법원장은 당시 독학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스승의 집에서 책꽂이에 들어찬 법률 서적을 지켜보고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된다.

 

1961년 제주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장학금을 받으며 고시 공부에 매진한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 종로구에서 하숙집과 독서실을 오가며 법학, 경제학, 행정학 관련 서적을 보면서 독학했다.

 

경제적인 문제는 학생 과외 등으로 해결했다.

 

마침내 청소년기와 20대의 역경을 딛고 1969년 행정고시(7회)에 합격하는 영예를 안았다.

공직자의 꿈은 중학 시절 아버지의 친구인 한학자의 영향도 컸다.

 

주말에 집을 찾으면 ‘선비 정신’의 가르침을 받아 마음속에 품게 됐다.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 문신으로 꼿꼿이 소신 있는 선비의 길을 걸었던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국가를 위해 바른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의 공직 입문과 공직 생활에는 동네 1년 후배인 아내의 뒷바라지가 큰 힘이 됐다.

 

고등학생 때 예쁘게 눈에 띈 김양춘씨를 쫓아다니며 구애를 했고, 1968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먼저 직장을 다닌 김씨가 학비와 고시 공부에 보탬을 주었고, 정신적으로도 든든한 후원군이 됐다. 3년 전 사별의 고통을 겪었지만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틋하다.

 

▲ 전승규 전 해양수산부 차관은 1998년 해운항만 분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첫 차관으로 임명했다. 사진은 왼쪽 첫 번째가 전 전 차관.

▲ 공직사회에 자신감을 얻다

 

그는 행시 합격 후 교통부로 발령을 받으며 30년 가까이 해운항만부서와 인연을 맺었다.

 

1970년 교통부 산하 제주지방해운국 관리과장으로 근무, 고향에서 첫 공직 경험을 쌓았다.

이듬해부터 1978년까지 기획관실, 육운국에서 다양한 실무를 보았다.

 

특히 사무관(5급)이던 1976년 ‘버스 운송 사업체 기업화’ 사업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차주별로 운영되던 버스업체를 현재의 회사 형태로 바꾸는 업무를 맡았는데 차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버스 몇 대를 소유하면서 사장 노릇을 하던 차주들은 회사 형태로 통합될 경우 주주로서 경영에 일부 참여하지만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백명의 차주들을 만나 소통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설명회는 학교 강당에서 진행됐는데 차주들이 강당을 점거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이에 30대 초반 사무관의 용기로 강당에 홀로 남아 수시간에 걸쳐 차주들과 토론하며 끝내 오늘날 회사 형태의 버스업 도입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위해 토론을 즐기는 스타일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제주에서 초·중·고·대를 졸업, 서울지역 명문 대학 출신의 동료나 부하 직원들에게 움츠러들기도 했는데 이 일로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78년 인천지방해운항만청 부두과장 재직 시에는 모범적인 항만 질서로 전국 항만에 우수 사례로 전파됐다. 인천항에서 각종 화물 하역 과정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지저분해진 주변을 쾌적하게 정리했다.

 

이어 제주지방해운항만청장, 마산지방해운항만청장, 동해지방해운항만청장, 울산지방해운항만청장, 부산지방해운항만청장 등 전국 주요 항만을 책임졌다.

 

1980년대 중반 교통부 수송조정과장 재직 시에는 화물 제도 개선에 나서 오늘날의 택배 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이를 위해 화물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1993년 해운항만청 선원선박국장 당시에는 선원직을 매력있는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 선원 제도를 현대화하는 등 선원 행정에 대한 중장기 비전을 제시했다.

 

1994년부터 2년간 해운항만청 항무국장 재직 시에는 항만사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직영을 하며 맡았던 항만 사업을 부두운영회사라는 민영 회사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항만노조가 지위 약화를 우려해 반대에 나섰고, 공무원들의 반대 기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 없는 설득으로 노조, 하역회사, 정부 간 타협을 거의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사업에 대한 정책 결정 서명은 그가 1998년 차관에 임명된 이후 이뤄졌다.

 

▲ 연줄 없이도 차관에 오르다

 

그는 1996년 8월 신설된 해양수산부 초대 기획관리실장으로 발탁된다.

 

김영삼 정부가 건설교통부 산하 해운항만청과 농림수산부의 수산청을 통합해 해수부를 탄생시키면서부터다.

 

국회 업무보고 등 신설 조직의 바쁜 업무를 수행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특히 수산분야에는 사실상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문외한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 해 연말 과로가 쌓이면서 출혈성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아픔도 겪었다.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 걱정이 있었지만 당시 신상우 장관, 행시 동기인 임창열 차관, 직원들의 격려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1997년 제1차관보에 이어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첫 차관에 임명됐다.

 

어느 누구에게도 승진 부탁을 해본 적이 없지만 해운항만통이라는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해양강국, 해운대국으로 성장하는데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차관 재임기간 한일어업협정 파동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998년 1월 23일 일본이 기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 새로운 어업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같은 해 9월 25일 협상의 기본원칙에, 1999년 2월 상대국 EEZ(배타적 경제수역)의 입어 조건에 대해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우리 측의 쌍끌이 어업 등 쿼터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자 어민들이 반발했다.

 

그는 “일본의 기존 협정 파기로 우리가 일본 해역 가까이에서 조업하지 못해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타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 전 전 차관은 공직 퇴임 후에는 한국선급 회장으로서 국내 선박안전성의 수준을 높였다. 사진은 2002년 한국선급 회장 당시 영국선급 회장과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는 모습.

▲ 한국선급 수장으로의 새출발

 

그는 1999년 5월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후 2000년 1월 한국선급 회장에 이름을 올렸다. 또 재선에 성공에 2003년 4월까지 선박안전성에 대한 수준 높은 기술 서비스 제공, 국제적인 위상 강화에 전력을 쏟았다.

 

선박안전검사기관인 한국선급은 대한민국 유일의 선급단체로 해상에서의 인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고 조선해운 및 해양에 관한 기술 진흥을 목적으로 1960년 창립된 비영리 민간기업이다.

 

그는 재임 기간 두바이를 비롯해 미국 휴스턴, 뉴올리언즈 등에 해외 사무소를 개설, 국제적인 입지를 넓혔다.

 

그는 “우리나라 선박기술자의 실력이 세계에서 인정을 받을 정도로 대단하다”며 “선급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두터운 신앙 생활에 매진하고 있다.

 

바둑을 취미로 각종 바둑모임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

 

▲ 고향 제주의 발전에 거는 기대

 

그는 대학 졸업 이후 50여 년을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제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특히 해양항만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제주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장점인 바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체험과 행복한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면 관광객을 오래 붙잡아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주 현지에서의 관광 이미지가 좋으면 청정 수산물을 비롯한 제주산 제품을 국내 어느 곳에서도 받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도민 소득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크루즈 관광 활성화를 주문했다.

 

그는 또 국민소득이 향상될수록 여가 선용으로 많이 찾게 될 요트 관광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추진 중인 제주신항 개발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도내 섬 해안을 따라 곳곳에 만들어진 항만 활용 방안 마련도 강조했다.

 

김재범 기자 kimjb@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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