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遍揷茱萸少一人(편삽수유소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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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詩 靜軒 金龍徵(작시 정헌 김용징)

去年今日携兄弟 거년금일휴형제 지난해 이맘때 형제와 같이/

共揷茱萸拜老親 공삽수유배로친 수유를 머리에 꽂고 노친께 절을 하였네/

佳節重回吾獨遠 가절중회오독원 좋은 절기가 돌아와도 나 홀로 멀리 있어/

黃花應笑旅遊人 황화응소여유인 국화꽃은 나그네에게 웃음으로 응대하네/

 

▲주요 어휘

▲携=끌 휴 ▲揷=꽂을 삽 ▲茱萸=산수유 나무, 노란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黃花=국화꽃 ▲旅遊人=나그네

 

▲해설

김용징(金龍徵, 1809~1890)은 조선조 헌종․철종․고종 때의 유학자 ․ 문인이며, 성균관 진사, 제주향교 교수(종6품), 서예가로서 제주사림(士林)의 영수(領袖)로 추앙받았던 교육자이다. 자(字)는 운경(雲卿)이며 호(號)는 정헌(靜軒), 본관은 김해(金海), 애월읍 납읍리에서 부친 김봉철(金鳳喆)과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에 전라북도 부안의 명유(名儒)를 찾아가 15년간 유학길에 올라 학문 수학(修學)에 진력하였다. 24세에 전주에서 시행한 승보시(陞補試) 초시(初試)에 입격하였으며, 25세에 승보시 복시(覆試)에도 입격하였다. 강릉 부사로 있던 이원조(李源祚)가 제주 목사로 전임되어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을 새로 수찬(修撰)할 때, 공은 이미 유림간의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33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유사(有司)로 선발되어 탐라지초본 제주목 편을 집필하였다.

 

35세 2월에 한양에서 시행한 진사시(進士試) 복시에 입격하고 그 해 5월 초에 성균관에 입교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40세에 공은 성균관에서 6년간 유학 경전 등 학술 이론과 학문을 연찬한 후, 벼슬에는 뜻이 없어 헌종 14년(1848) 40세의 나이에 고향 제주로 귀향하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敎化)를 위해 국가에서 세운 제주향교, 정의향교, 대정향교 등 3개의 향교가 있었다. 43세에 제주향교 교수로 임명되어 30여 년 동안 오직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는데, 나중에 정의향교 대정향교까지 3향교 교수를 겸임하면서 제주 교육발전에 헌신하였다.

 

73세에 공은 30여 년간의 제주 향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향리 납읍으로 귀향하여 찾아오는 인근 유생들의 학문을 권장하는 등 오직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공의 문하생으로는 장령 김명악(金命岳), 승사 변지열(邊之悅), 감찰 문두천(文斗天), 진사 김성호(金性昊)·김기추(金箕樞)·강승모(姜昇模), 무과 병과에 입격한 김기현(金沂鉉), 천문학관·절충장군 안양필(安良弼), 교수 양지권(梁志權)·양재권(梁在權) 등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해설 금산 조용옥>

 

 

 

 

 

 

 

 

 

 

 

 

 

 

 

 

 

 

 

 

 

 

 

 

 

 

 

 

 

 

 

龍門奪袍 칠언절구 작시 정헌 김용징

 

九重宮殿 入雲高 구중궁전 입운고 구중궁전에 응시생 구름처럼 많아

餘輩居然 風下去 여배거연 풍하거 남은 무리들 슬그머니 바람처럼 떠나가네.

第一人傳 第一袍 제일인전 제일포 제일인에게 도포를 전하여

長安市上 擅詩豪 장안시상 천시호 온 장안에 시호를 드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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