듬삭하고 베지근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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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수필가

가끔 TV를 켜면 먹거리 프로그램이 시청률을 높인다고 법석이다. 덩달아 식문화를 쾌락과 욕망이라고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 가히 먹거리 천국이다.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건 선택이고 지혜다. 맛을 가린다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살아온 세대들에겐 사치스럽게 보일지 모르나 지금은 맛에 대한 개념이 예전 같지 않다.

요즘은 새롭고 다양한 먹거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선보인다. 상상을 초월하는 먹거리들이다. 먹거리의 속성은 맛이다. 맛에는 새 맛과 옛 맛이 상존하기 마련인데, 작금엔 구수한 된장 냄새로 갈음되는 옛 맛은 밀리는 형국이다. 맛에는 상징성이 내포되어야 한다. 맛에 대한 표현에도 맛의 지니는 독특한 이미지가 담겨있어야 되는 건 필수다.

한 십 년 됐을까. 제주의 맛을 주제로 한 TV프로그램이 있었다. 방송의 내용은 이 고장 어르신들을 모신 장수 프로였다. 고희를 넘긴 부부 네 쌍을 모시고 삼십대의 아나운서가 퀴즈를 냈다. “표준어로 고소하다는 말을 제주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네 쌍의 부부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표준어로 고소하다는 말을 제주 고유의 말로 어떻게 표현하면 될 것인가. 한참 후 한 팀에서 “코시롱하다”라고 말했으나 진행자는 답이 아니라고 고갤 저었다.

쉬운 말인듯한데 답이 나오지 않아 고심하던 아나운서가 제주말로 ‘베’로 시작되는 맛이라고 힌트를 주었다. 그제 서야 한 팀에서 “베지근하다”라고 대답하자, 아나운서가 정답이라고 박수를 쳤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한 향토사학자가 베지근한 맛을 표준어로 담백한 맛, 고소한 맛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향토사학자의 말이라 그러려니 했으나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제주 고유의 맛을 가감 없이 표준어로 표현하려는 건 억지다.

제주에만 있는 베지근한 맛을 굳이 고소한 맛, 담백한 맛에 맞추려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고소한 맛은 냄새와 가까운 표현이다. 내남없이 맛 이야기를 할 때 ‘담백하다, 고소하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쓰는 것도 썩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다. 담백한 맛은 깨끗하고 산뜻한 맛으로 표현되는 게 사전적 의미다. 깨끗하고 산뜻한 맛은 일상적인 오미(五味)에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상큼한 맛이라는 말도 자주 쓰는데, ‘상큼하다’는 맛이 아니라 식감이다.

어쨌거나 제주 고유의 맛인 베지근한 맛을 굳이 표준어로 표현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듬삭하다’라는 맛이 있는데 이 맛 역시 표준어로 말하기가 난해하다. 듬삭하고 베지근한 맛은 제주 고유의 식문화에서 유래된 오묘한 맛이다. 이 맛을 표준어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건 코미디적 발상이다. 표준어를 아무데나 갖다 붙이면 혼란스러워진다.

듬삭하고 베지근한 맛은 제주 고유의 전통과 식문화를 아우른 맛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맛보는 다섯 가지 맛인 신맛·단맛·쓴맛·매운맛·짠맛에 덤으로 듬삭하고 베지근한 맛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제주에만 유래되어 온 맛의 정서다.

옛 어른들은 잔칫집에 다녀와서는 돼지고기 맛이 듬삭하더라고 말했고, 제사 때 구운 옥돔이나 옥돔으로 끓인 갱(羹)을 먹으면서는 베지근하다라고 표현했다. 베지근하고 듬삭한 맛에는 다른 말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제주의 별미인 옥돔구이나 삶은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담백하다, 고소하다라고 말하는 건 난센스다. 삶은 돼지고기의 맛은 듬삭하고 옥돔국과 옥돔구이는 베지근 할 뿐, 달리 표현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듬삭하고 베지근한 맛, 이 맛은 제주만이 향유하는 맛의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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