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訓育)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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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장난감은 아이들에게 세계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도구다.”

한창 나이 때, 근무하던 J고 교무실에서 진행된 한 교육석학의 강의 요지다. 잊히지 않는다. 구체적 예시(例示)가 있었는데 세월 속에 마모(磨耗)돼 말 속의 뼈만 남았다.

토씨까지 빠뜨리지 않고 문장 하나만 달랑 기억의 방에 앉아 눈을 빛낸다. 필력 좋은 글로 받아 액자에 걸어 놓은 양하다. 깊숙이 각인됐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가설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계의 권위인 교수의 말에 대한 신뢰는 곧 검증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여서 집에 접목하면 좋은데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처우가 썩 좋지 않던 때라 두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 줄 여유가 없었다. 팽이나 장난감 자동차 따위가 고작이었다.

그 후 세상이 살기 좋아졌지만 아이들이 다 큰 뒤다.

젊은 부부들이 방 하나 가득 장난감 천국으로 만들어 놓는 걸 보면 부러웠다.

‘저래야 눈앞의 사물이 개념으로 깨어나는 건데….’ 하지만 버스는 지나가 버렸다.

‘장난감을 사 주지 못한 대신 뭘 해줘야지.’ 만회할 것을 찾아 이쪽저쪽 기웃거리게 됐다.

그러려면 ‘그럴 감’이 있어야 한다. 어떤 ‘소재’? 한데 그걸 포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 속에서 드디어 발견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아주 가까이서 손이 뻗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훈육(訓育)이었다. 꺼내 놓고 놀랐다. ‘아, 장난감만 아니라 훈육도 도구다. 문제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기본이 되는 삶의 도구!’

괴로움을 견디게 하는 테크닉, 문제가 주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가 훈육이다.

나 자신 그리고 두 아들을 훈육시킨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닐 것 같았다. 그것은 일에 대해 괴로워하는 법과 동시에 성장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먼저 아이들을 두려움에서 풀어주는 데서 출발했다.

혹시 아이들에게 도사리고 있을, ‘내 부모가 자신들에게서 떠나가거나 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나 불안감. 그것들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켜 줘야지 한 것이다.

당장 나를 반성했다. ‘내가 말한 대로는 하되, 내가 행동하는 대로는 하지 마라’ 만날 술 취해 비틀거리고 어머니에게 욕지거리나 하고.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절제하고 질서를 세우고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 말의 씨알이 먹히겠는가.

이 인식 전환은 우선 무절제한 음주 습관에 적잖은 변화를 불렀다. 그뿐 아니다.

국어선생으로서 언어부터 순화하자 했고, 도덕적으로 수범을 보이려 안간힘을 썼다. 시종 머릿속이 훈육이란 말에 점령됐다.

아이들에게 못 사 준 장난감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체기능으로 훈육이라는 도구 사용! 시간이 많이 지났다. 아이들이 장성해 성실하게 살고 있다. 훈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키운다. 애써 얻은 경험칙이다.

조금만 한 단계 더 발달하기를 기다린다.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고, 책임을 지고, 진리에 대해 헌신하고, 균형 잡기. 훈육의 이들 네 가지 중 아직은 하나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 완전체란 없으니까.

하지만 한 발짝씩 다가가야 하는 것이니, 자신을 더 갈고 닦으라 한다.

훈육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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