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자유로운 유년의 삶, 큰 경제 흐름 따라 맥 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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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기숙생활하다 유학길 올라
새로운 경제 해석으로 한국경제연수원·경기개발원장 등 맡아
▲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원과 한국경제연구원장 등을 역임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보수 경제학자인 죄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박정희기념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과 한국경제연구원장 등을 역임했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보수 경제학자로 유명하다.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국민경제자문위원, 대통령 자문 국가경쟁력강화위원 등을 거치면서 국가 경제 자문 역할도 수행해왔다.

 

평생을 경제학 연구에 몰두한 그는 정통 주류 경제학으로는 박정희 시대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고속 성장은 물론,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보편적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모순을 발견하고 시장 중심의 경제학에 대한 대안으로 기업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주창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박정희 시대의 경제 발전론 등을 재조명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홀로 남겨진 소년, 자유주의적 삶과 사상 형성하다=그는 1947년 한경면 용당리 주전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출생 10개월 후 4·3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10살 때는 모친도 부친을 찾아 일본으로 가면서 조부모, 고모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용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창중에 일등 장학생으로 선발돼 학비 없이 중학과정을 다녔고, 학교가 끝나면 잔소리(?)하는 부모없이 혼자 사색하고 상상하며 살았다.

 

좌 이사장은 크게 구속 받지 않고 지낸 10여 년의 소시적 삶이 자신의 ‘자유주의적 삶과 사상’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밝혔다.

 

제주일고에 수석 입학한 그는 당시 생긴지 얼마 안 된 5·16장학금을 3년간 받았다.

 

그는 “당시에는 장학금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주변에서는 촌놈이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법대를 권했지만 그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고 당시 커트라인이 최상이었던 서울대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모형과 기념촬영한 좌승희 이사장.

▲사회와 세상 이치를 배우다=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그는 가장 오래된 좌파 운동권학생서클로 유명한 ‘경우회’의 멤버가 돼 칼 마르크스를 비롯한 좌파 경제학을 공부한다.

 

주류 경제학과 좌파 경제학을 같이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당시 동백림사건에 멤버들이 연루되면서 이론경제학회라는 새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거기서 그는 선배인 고(故) 신영복 교수와 고(故) 김근태씨 등을 만났다.

 

그는 사회주의적 이념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 서클 내의 반동 역할을 했다고 회상한다.

 

대학생활동안 성적 우수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그는 “당시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과 생활하면서 훌륭한 이웃이 있어야 나도 배우고 더 잘될 수 있다는 세상 이치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학시절 나름대로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묘미를 느끼면서 주위의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미국이라는 선진국에 유학간다는 소리를 들었고, 대학 2학년 때 새로 부임한 조순 교수의 강의를 듣고 유학을 결심했다.

 

졸업 후 2년 여의 군 장교생활을 마친 그는 한국은행에 복직하고, 졸업과 동시에 휴학했던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에 복학해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유학 준비를 했다.

 

이때 친구의 소개로 간호사로 미국 이민을 결행한 한 여인을 만났고, 1년여의 편지와 전화로 교제를 지속하다 결혼한 뒤 미국 명문대 중 하나인 UCLA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유학시절에 대해 “당시 UCLA 학풍이 실사구시적이어서 도그마화된 교과서적인 공부보다 실제 피부에 와 닿는 현실 문제에 대한 자유분방한 연구와 토론이 활성화돼 있었다”며 “오늘날 내가 경제학을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이나 그동안 새로운 경제발전론 연구에 전념하게 된 것도 이런 학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학 마지막 5년차 해에 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출강도 하고, 딸도 낳았으며 박사학위를 마친 뒤 미국 연방은행 연구관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연방은행 생활은 길지 못했다.

 

박봉에 시달리고 연구생활도 만족스럽지 못하자 2년여의 생활 끝에 자리를 권유한 한국개발연구원(KDI)로 자리를 옮기면서 귀국했다.

 

▲대표적 경제정책 자문역으로 나서다=KDI 재직 시절 그는 잘못된 관치를 청산하고 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 정착을 위해 노력했고, 금융자유화, 금리자유화계획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1987년 KDI의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의 재검토 연구에도 참여했다.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연구 참여에 대해 좌 이사장은 “당시 강력하게 주장해 제주대 교수님들을 포함한 현지 전문가들을 대거 참여시켜 이후 제주도 전문가그룹의 형성과 자체적 연구역량을 확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제주도 개발계획에 대해 자문하고, 강연하고, 도민들과 제주도의 미래에 대해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최종현 SK 회장과 손병두 부회장의 요청으로 한국경제연구원장을 맡아 8년간 4회 연임했다.

 

당시 주변에서는 “왜 전경련 연구원장을 하느냐. 재벌이 인기가 없는데 왜 그들을 대변하느냐”는 지적이 많았지만 어린시절 형성된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하는 성향과 확고한 반 관치 철학을 바탕으로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고, 정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를 “KDI 생활을 통해 정부의 정책 형태를 나름 깊이 알고난 후 기업부문의 형태를 소상히 할고 공부할 수 있는 너무나 유익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좌 이사장은 “2003년 이후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이 정부 쪽에서 문제가 된다고 해 대기업들이 부담도 느꼈는지 2005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국경제연구원장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사임하고 난 후 그는 KDI정책대학원과 서울대 국제대학원 등에서 초빙교수생활을 했다.

 

2006년 6월 지방선거 후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경기개발연구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고 큰 주저없이 원장직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중앙정부와 기업무분의 경제정책 문제를 공부한 후 지방의 경제문제와 지방자치단체 행정을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었다”며 “인생에 큰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 신념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좌 이사장은 “박사학위 공부 시절부터 기존의 경제학이 추상화가 심하고 이념화돼 실사구시성을 상실해 현실 경제 변화에 대한 설명력이 취약하다고 생각해 대안 경제학에 관심이 컸다”며 “나름대로 경제발전 현상과 시장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해석 등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에 있어서 시장과 정부 그리고 기업의 역할, 민주주의의 역할, 경제 평등과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심도 있고 설득력 있는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내놓은 다수의 이론서를 출판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그만이 제시하는 명제들이 있는데 이를 보면 ‘경제적 성과에 따른 보상의 차별화는 경제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반대로 성과를 무시하고 평등하게 보상하거나 대접하는 경제평등주의는 경제 실패의 충분조건’, ‘사회주의 경제 평등이념은 어떤 경우에도 경제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 정체의 길이다’ 등이다.

 

▲ 2009년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제29회 의정포럼에서 강의하는 좌승희 이사장.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을 맡다=그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은 이유에 대해 “박정희 시대의 산업혁명은 30년간 세계 최고의 동반성장을 이룬 경제발전사의 금자탑으로서 많은 후진국과 저성장 추세에 빠진 선진국이에 꼭 필요한 교훈을 담고 있지만 세계 및 한국경제학계는 아직도 이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내가 개발한 경제발전의 일반 이론이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의 열쇠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향후 재단을 이끌 방향에 대해서는 “오늘날 저성장, 양극화로 질주하고 있는 한국경제의 회생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며 “자기 책임없이 민주라는 방종 속에 자기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국민들의 잘못된 의식과 이를 조장하는 표퓰리즘 정치의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실패를 부채질하는 경제평등주의에 빠진 정치권의 각성도 촉구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런 경제평등을 추구하는 표퓰리즘 민주정치를 배격하고,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국민들을 독려함으로써 자조, 자립, 협동정신의 함양을 통해 당대는 물론 역사상 최고의 동반성장을 이뤘음을 환기시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후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좌 이사장은 후세들에게 “제주를 넘고 한국도 넘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큰 사상적 고민을 품고 그 해결책을 찾는 인생을 그려보시라 하고 싶다”며 “그러나 항상 현실이라는 삶의 현장을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실패한 사상가, 정치인들은 모두 허황된 이상만을 들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들”이라고 조언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제주를 위해 일을 해달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지만 결행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라는 좌 사장은 “앞으로 도민들과 제주의 미래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대영 기자

kimdy@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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