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있는 삶을 위한 祭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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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실. 전 제주산업정보대 부학장

작년 이맘때 지인이 돌아가서 서울에서 온 선배와 같이 문상하고 장지에 갔다가 제례 세태의 변화를 보고 당황스러웠던 일이 있다.

장례는 양지공원에서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한 후 우제를 치르고 축문을 낭독했다. 그 축문의 내용을 들으니 엄급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 대상 (大喪)까지 내리읽어가고 모두 마쳐 상복을 벗는 것을 보고 간편하지만 당황스러웠다.

우리에게 깊이 박힌 효의 사상은 상측치기애(喪則致其哀)라 했으니 상을 당하면 애도하고, 벼슬하다가도 그만두고 낙향하여 상을 치르고 탈상을 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갔던 것이 우리 조상들의 효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상을 치르고 난후 첫 제사에 탈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앞에 말한 장례에서는 3일로 아버지의 탈상을 양지공원에서 모두 마쳐서 집으로 올 때는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어 편하게 왔으니 모셨던 영정이나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원래 우제는 장사 당일 지내는 초우(初虞), 다음날 지내는 재우(再虞), 3일에 지내는 삼우(三虞)를 마쳐야 장례를 마친 것으로 보는데, 보통 우제는 모두 생략하고 당일에 지내는 경우는 있지만 탈상까지를 당일에 하여 훌훌 털어버리는 현상을 본받을 일은 아닌 것 갔다. 서울에서 온 선배는 그 모양을 보고 “제주에서는 이리 상례의 풍속이 바뀌었느냐?”라고 물으나 무어라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일을 보면서 고려장 생각이 났다. 옛날에 한 남자가 늙어 병들은 아비를 지게에 지고가 산속에 버려두고 돌아오려 할 때 같이 따라갔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고 온 지게를 챙기고 내려온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지게를 왜 가져오느냐?” 했더니 아들의 대답이 “아버지가 늙으면 나도 이 지게로 아버지를 져다 버리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의 그 말에 남자는 뉘우치고,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와서 봉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에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가 채집한 조선의 구비전설설화에 있는 내용이다. 마치 한국에 고려장이 있었던 것처럼 암시하고 있으나 한국에 고려장은 없었다.

일제 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한국의 고분을 발굴하며 한국에는 조상을 업신여기는 습관이 있었던 것처럼 꾸며놓은 식민사관의 이야기라 한다.

옛날은 지게라도 있으니 아들이 지게를 지고 와서 아버지를 자극했는데, 지금은 지게도 없으니 그 지인 상주의 아들도 당연히 상주가 돌아가면 아버지처럼 그리 할 것이고, 그 집안에서는 부모가 돌아가면 장일 날에 탈상하는 제례 습관이 전승될 것이니 자연히 근본이 없는 집안이 돼갈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듯이 조상이 없는 자손이 있을 수 없다.

조상을 귀히 여기고 숭배함은 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히 되고자 함이며, 조상이 훌륭함을 들어 내 보이려는 것은 자기 자신도 훌륭할 수 있다는 긍지를 가지기 위함이다. 그것이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사회를 유지하는 사대부의 정신이다.

그런 뜻을 모르면 간편한 것만을 좋아해서 위의 장례와 같이 장례식장에서 탈상을 하여 자신과 후손을 비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후손의 품격 있는 귀한 삶을 위하여 전통을 지키고 선인의 예(禮)를 따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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