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돌에 기록 남겼던 인류의 비밀 풀어내는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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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이름·행적·묻힌 장소 기록해 묘역에 세운 돌
가문을 위한 의무로 여겼자만 관념 변화로 종류 등 달라져
▲ 가례증해의 비석 그림.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돌은 딱딱함, 거칢, 항구성, 크기, 형태, 색을 통해서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어떤 세계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에 ‘제의의 도구’로 쓰였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실제로 돌은 제주 사회에서도 신성성을 위해서 의례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돌탑의 일종인 거욱대, 본향당의 신석, 미륵불, 동자석, 비석도 개인, 가족, 마을의 제의를 위해 쓰인 것이다.


영혼을 위해 돌이 도구로 사용된 예 가운데 특별한 것은 비석이다. 인류가 돌을 사용한 이래 많은 정보가 이 비석에 남겨져 있고, 고대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비석은 그야말로 사자(死者)의 유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산자(生者)의 믿음이 제도화된 것이다. 이것을 ‘기념비성’이라고 하는데 이 기념비성은 국가, 마을, 가문의 영광과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의 근간(根幹)에 불과하고 그것은 국가에 의해서 장려되고 국가정책과 은연중 닿아있다. 사실상 비석의 기능은 자랑할 만한 것을 돌에 새겨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비석의 유래


원래 비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행적, 가계, 묻힌 장소 및 연도 등을 기록하여 묘역에 세운 돌이다. 진(秦漢)나라 때 진시황이 태산에서 천지의 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한 후 정상에 비석을 세워 그것을 기록하게 된 것이 처음이다. 또한, 장례의례 절차에서 유래한 풍비(?碑)설, 묘정(廟廷)에 건립되는 일영비(日影碑)설, 사자를 매장한 곳을 표시한 갈(碣)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예의 실천은 특히 장례에서 중시되었던 것이므로 장례의 일환으로서 묘비의 건설이 후한 시대에 성행하게 되었다. 후한(後漢) 시대의 저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갈(碣)은 우뚝 선 돌이다. 홀로 서 있는 돌’이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위는 작고 아래는 자연석에 가까운 형태의 비(碑)를 갈(碣)하고 머리 부분을 원형이나 양쪽 끝을 말각형(末角形)으로 깎은 모양의 직사각형 석각을 ‘비(碑)’라고 한다. 그러나 한나라 때부터 이렇게 각각 비와 갈을 구분하여 부르거나 비석과 비갈을 각각 구별해서 세우지는 않았다. 당나라 때(唐代)에 와서는 방(方)인 것을 비, 원(圓)인 것을 갈(碣)로 구분하기도 했다.


또, 조선 시대 대표적인 예학자(禮學者)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에서, “원래 비(碑)의 기원은 ‘풍비(風碑)’라고 하여 비석 모양을 나무로 만들어 관곽의 앞과 뒤에 세워 관을 구덩이에 내릴 때만 쓰인 것이었으나, 진한(秦漢)에 이르러 비로소 돌을 깎아서 그 위에 글자를 새기고는 그것 역시 ‘비(碑)’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또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사이에 죽은 자들이 모두 신도비(神道碑)가 있게 되었는데, 당시 지리가(地理家) 들이 동남쪽을 신도(神道)라고 하면서 그곳에 세웠으므로 이로 인하여 신도비라고 한 것이다. 묘갈(墓碣)은 근세에 5품 이하가 쓰는데 글은 비문과 같다. 묘표(墓表)는 관직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모두 쓸 수가 있으며, 묘의 왼쪽(망자 시점·필자)에 묘표(墓表)를 세운다. 또 묘비나 묘표에는 학행(學行)과 이력(履歷)과 훈업(勳業)을 쓰고, 묘지(墓誌)와 묘명(墓銘)에는 세계(世系)와 관직(爵里), 생졸(生卒)을 서술한다.”라고 했다.


▲비석, 업적과 칭송의 표현물


비석은 사자(死者)의 위업(偉業)이나 생애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미가 있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혹은 자신의 삶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 세상에서의 영예나 자신에 대한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때로 강진에 유배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처럼 자신의 묘비명(墓碑名)을 스스로 짓는 사람도 있다. 일생을 서민으로 산 사람들은 죽어서 남길 직분이 없어서 후손들은 벼슬할 수 있는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한 단계 높여 비석에 ‘학생(學生)이나 처사(處士)’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문을 생각해서 무덤에 산담을 하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여 조상에게 평생 빚진 것처럼 큰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 제주식으로 토착화된 비석으로 팔작지붕과 비신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붙어있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념의 변화


최근의 가족 묘지를 조성하는 노력도 사후 세계의 평안을 기원하는 산 사람들의 열정으로 비친다. 조선 시대는 체제이념이 예(禮)를 중심으로 한 관혼상제의 예법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도리로 여겨졌고 그것을 기준으로 효(孝)와 충(忠)이 평가되었다. 부모에 대한 효도의 근간을 예법의 수행 여부로 판단했던 사회이고 보니 당연히 관혼상제가 국가와 가정의 중심이 되었다. 즉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가 조선시대 사회적 덕목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지금 산야(山野·밭과 들)의 장법을 보아서도 사회적 의식이 급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상장 제례의 변화된 모습은 유교의 질서가 급격히 거부되거나 무너지고 있고, 그것이 자본주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로지 생장(生葬)을 고수했던 관념이 어느새 화장(火葬) 중심으로 장법이 달라졌다. 비석의 종류도 달라져 오석, 화강암, 대리석의 석물이 제주 조면암 비석 자리에 교체됐는가 하면, 봉분을 조성하지 않은 채 평장(平葬)에다 산담 쌓기는커녕, 기존의 산담마저 허물고 있다.

 

어떤 집안은 이장한 산담 안에 다시 가족묘를 조성하고 있는데, 다른 곳의 무덤에서 이장한 유골을 화장하여 다시 평장으로 봉행하고 비석을 열지여 세우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점점 늘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따로 가족묘를 조성하지 않고 집안의 산담이 있는 큰 무덤을 한 곳 선정하여 화장한 선조들의 유골을 차례로 묻어 가족묘 대용으로 조성하는 것은 사회, 경제적인 이유가 크기 때문이다.

 

묘지의 관리 측면, 이미 가지고 있는 무덤의 토지를 사용하는 측면(경제성), 벌초나 제례를 지낼 때 이리저리 이동하지 하는 시간의 효율성(합리성) 등 여러모로 현실에 맞는 장점이 많게 된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는 장묘 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죽음에 대한 근본 관념, 즉 사후관, 주검의 장소에 대한 의식도 함께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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