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고전 심취했던 시골소년, 검사장까지 오르며 족적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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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4년 재학중 사법고시 합격…4.13총선서 신예 정치인으로 변신
▲ 강경필 변호사는 지난 4.13총선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사진은 강 변호사가 서울에 있는 사무실에서 검사로 활약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

강경필 변호사는 제주 출신으로는 드물게 검찰에서 검사장 직위까지 올랐다.

 

대표적인 ‘공안통’, ‘특수통’ 등의 화려한 경력을 뽐내지는 않지만 국제기구 파견과, 국회 전문위원 활동 등 검찰에 근무하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했다.

 

또 현직에 있으면서 ‘미국의 국가배상제도’, ‘외사사범 수사실무’ 등의 논문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천제연서 놀던 소년 서울대 법대에 가다=강 변호사는 1963년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출생하고 중학교까지 지역에서 다녔다.

 

당시에 대해 그는 “초등학교 때 고전경시대회가 있었는데 동기, 선후배들과 밤늦게까지 삼국유사 등의 책을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고전경시대회와 과학경시대회에 입상해 서울 구경을 몇 번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서울 가는 것이 요즘 미국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시절이었지 싶다”고 회상했다.

 

강 변호사는 “중학교 때까지도 여름만 되면 중문 천제연과 지금의 주상절리 근처 바닷가를 헤매며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며 돌아다녔다”며 “면 단위 중학교라서 그런지 공부하는 것이 그다지 절박하지는 않았고, 중학교 3학년 하반기에 제주시도 고교입시를 폐지하고 연합고사를 치르면서 추첨 결과 제주일고에 배정됐다”고 말했다.

 

고교시절에 대해 그는 “제주시와 읍, 면지역의 생활 여건이나 학력에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제주시에서의 생활이 좀 낯설고 여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대입 본고사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본고사가 폐지되고 학력고사로 대체됐다.

 

당시 제주도와 서울, 부산 등 타 지방의 학력 격차는 매우 컸는데 본고사 폐지로 인해 비교적 수월하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 강경필 변호사(사진 원쪽서 두 번째)가 지인들과 겨울 한라산을 오른 모습.

▲검사의 길을 걷다=서울대학교에 진학한 강 변호사는 일찍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4학년 재학 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는다.

 

강 변호사는 “당시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간 학생들 대부분이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며 “사법시험 공부를 오래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공부한 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적으로라도 여유를 가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85년 법과대학 4학년 때 2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17기로 수료한 뒤 군법무장교를 마치고 1991년 인천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서울중앙지검 검사와 부부장검사, 공판 1부장검사, 공주지청장 등을 거쳤고 미국 죠지타운대학 로스쿨 연수, 비엔나 유엔범죄예방기구 파견,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도 근무했다.

 

검사 재직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그는 현악기 밀수사건과 수백억원대 해외 도박 사건을 꼽았다.

 

현악기 밀수 사건에 대해 그는 “1999년 서울지검 외사부에 근무할 당시 바이올린 등 출처 불명의 현악기를 밀수해 현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수억원대의 고가로 매매하던 악기상들을 구속해 현악기 유통질서를 바로 잡았던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2001년 서울지검 외사부 부부장검사로 재직하면서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가명으로 수백억원대의 도박을 한 모 중앙일간지 회장을 수사해 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그는 “이 사건은 그 전에 두 번이나 수사했지만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던 것을 미국 사법당국과의 공조 수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 기소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후 강 변호사는 울산지방검찰청 검사장과 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장을 거쳐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을 끝으로 24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그는 검사 생활을 하며 후회가 남는 점에 대해서는 “사건 처리나 업무 처리에 있어 좀 더 성의를 가질 걸, 좀 더 융통성을 발휘할 걸, 좀 더 당사자의 입장을 헤아릴 걸 하는 등의 후회와 아쉬움이 많다”고 소회했다.

 

또 검사장을 끝으로 검찰 조직을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에 “검사장급 직위에 5년 6개월간 근무했다”며 “적절한 시점에서 후배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당연해 사직했고 아쉬움은 없다”고 말했다.

 

▲ 강경필 변호사 (사진 오른쪽서 세 번째)가 대검 공판송무부장 시절 김진태 당시 검찰총장(사진 원쪽서 네번째)과 도라산역을 방문한 모습.

▲검사 생활 접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다=강 변호사는 지난 4·13 총선에서 서귀포시지역구에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등록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의 변신에 대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면서 2년 4개월 동안 국회의 모습을 봤는데 나도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엇보다 제주 출신으로서 제주에 기여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주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정책과 예산인데 이는 국회의 업무로 국회의원으로서 정책을 입법에 반영하고 그에 따른 예산을 확보해 제주에 변화를 가져오고, 제주의 미래를 설계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했다.

 

정치인으로서 강경필에 대해 그는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쌓았고, 인적네트워크도 비교적 풍부하다고 자부한다”며 “이러한 자산을 활용해 고향 제주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소명이라고 감히 생각했기 때문에 변신을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 2012년 울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 성폭력 범죄·묻지마범죄·청소년범죄 등 3대 범죄 추방 결의대회 모습. 사진 앞줄 윈쪽서 다섯 번째가 강경필 변호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변호사로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법조인임은 분명한 것”이라며 “지금 당장 뭐라고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방법으로든지 제주의 현실과 미래에 긍정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제주의 미래와 제주의 발전 방향을 묻는 질문에 강 변호사는 고사성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꺼내들었다.

 

“나는 정말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것을 목도했다”며 “내가 나고 자란 중문지역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에는 중문 백사장과 천제연, 논밭과 과수원이 전부였는데 그동안 관광단지 개발을 통해 바닷가에 숙박시설, 상가, 골프장, 아파트, 펜션이 들어섰고 최근에는 땅값이 급등해 상상할 수 없었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관광산업이 호황이라고 하지만 그 수익이 도민들에게 얼마나 돌아가는지, 제주의 자연환경을 이용해 얻은 수익은 제주에 환원되는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도민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개발과 보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며 “제주도에 대한 투자는 받아들이되 제주가 외국인의 소유 내지 지배에 놓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장치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대영 기자

kimdy@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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