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그리고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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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요즘은 초등학교라 하는데 우리 세대는 국민학교라는 말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50년쯤 전인 1960년대 중반에 나는 동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그 때 지각을 꽤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종이 울리고 교문을 닫을 때 쯤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이 지각인데, 단속반도 철수한 다음 교문에 들어서는 아주 늦은 지각을 여러 번 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글이 실린 이 신문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는 제주신문(제주신보)에 글을 쓰셨다. 며칠에 한번 사설을 쓰셨고 일면 아래 가로로 길게 누운 ‘춘하추동’이라는 칼럼을 쓰셨다. ‘춘하추동’이라는 이름은 본인이 지은 이름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글을 쓰시면 아침 일찍 신문사에 가져가야 했다. 글을 가지러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가끔은 내가 가져가야 했다. 병세(病勢)가 심해진 이후로 아버지께서는 출근을 늦게 하시거나 가끔 하셨다. 그렇지만 글은 제 시간에 보내야 했다. 그래서 가끔 그 일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문사는 북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나는 동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냥 학교 가는 길과 신문사를 들러서 가는 길은 거리가 두 배 이상 되었다. 거리가 머니까 조금 일찍 출발하면 되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각을 자주 했었는가? 바쁜 시간일수록 빨리 하기 어려운 것이 글 쓰는 일이다. 그래서 학교 갈 아침 시간에 나는 기다려야 했다. 학교가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다 사라진 시간까지 기다릴 때도 있었다.

그렇게 기다렸다가 원고를 들고서 아주반점을 지나고 중앙극장을 지나서 신문사로 갔다. 그때쯤 북초등학교 정문에서는 지각한 아이들이 벌을 받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 때부터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동문로터리를 거쳐 동문파출소를 지날 때 쯤 길거리에 초등학생은 나 혼자였다.

지각은 했지만 기분이 참 묘했다. 아주 늦게 교문에 들어섰는데 누구도 나를 붙들지 않았고 벌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혼자서 터벅터벅 교실로 들어서면 담임선생님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조금 지각한 아이는 게으르다고 혼을 낼 텐데 아주 늦은 아이에게는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셨을까? 아니면 이렇게 대단한 지각에 대해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생각이 정리가 안되셨을까? 어쨌든 나는 큰 지각을 여러번 했어도 그 일 때문에 처벌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지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꽤 늦은 결혼을 했다. 남동생이 결혼한 다음에 겨우 결혼했다. 아이를 낳는 일도 지각했다. 40세에 첫 아이를 낳았으니까. 신학공부도 뒤늦게 시작했다. 이 신문에 글을 쓰는 일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 시작한 일이다. 매달마다 글을 보내야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늦었다. 그런데 그 옛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처럼 신문사 담당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각한 글 때문에 변명하느라고 이런 글을 쓴 것인가? 하면 그것만은 아니다.

가을은 깊어가고 별로 거둔 것이 없이 겨울을 향해야 하는, 마음이 추운 사람들에게 ‘좀 늦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좀 늦으면 야단을 맞을 수 있는데 아예 늦으면 야단치려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그러니까 이왕 늦은 김에 뚜벅뚜벅 걸어서 가려던 당신의 교실을 향해 그냥 걸어가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게 빨리 악착같이 걷고 뛰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모습들을 여유있게 바라보다가 좀 지각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어쩌면 그런 지각은 권장할 만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글을 쓰려고 했기 때문에 이번 달에는 글이 늦어졌다”고 말하면 그건 좀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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