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호감도 경쟁이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받았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미국 전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속도로를 점거하거나 건물의 창문을 깨부수는 등 폭동으로 치닫기도 했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단 하나, 트럼프를 자신들의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다.
같은 시기에 한국인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한국의 수도 심장부 광화문에서부터 제주시청 어울림마당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부터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한 목소리로 외친 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이었다.
많은 국민이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비슷하다. 배경은 다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도자들 자신이 만들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트럼프는 여성 비하 발언 등으로 자질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공격을 자초했고 박 대통령은 그 자신이 국기문란의 주체가 됨으로써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현자, 또는 철인에 의한 독재 정치를 옹호했다. 한 마디로 국가는 가장 현명한 인물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국가를 통치할 비전이 있는 사람이 국가 지도자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주의 함정에 대해서도 중우정치라는 딱지를 붙여 따끔하게 꼬집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외관상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며 능력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평등을 나누어주는 것도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폈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고 무절제와 방종으로 치닫는 사회 현상 등 중우정치의 병폐 때문에 민주주의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그 이후 세계 각지에 나타난 수많은 독재자들에게 바이블처럼 여겨졌다. 자신이 마치 플라톤이 말한 현명한 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독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절대적인 근거로 삼고 싶은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70년대 우리나라 유신독재 시절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 아테네의 몰락을 보면서 침을 뱉었던 중우정치의 망령은 지금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도 중우정치의 망령이 부린 조화일 뿐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반지성적인 유권자들이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탄한 건 설득력 있는 진단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선거 때만 되면 바람에 휘청거리는 정치판은 중우정치의 망령이 활개 치는 무대다. 그리고 인기영합주의와 맹목적인 지지, 지역감정 등이 혼재된 팬클럽 정치는 그것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그런 무대에 자랑스럽게 올라 주인공을 자임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날 때쯤에는 하나 같이 고개를 숙이며 쓸쓸히 사라졌다. 그런 걸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건 국민들의 몫이었다.
민주주의는 중지를 모을 수 있는 좋은 제도다. 하지만 플라톤이 지적한대로 중우정치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리석은 다수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가거나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기도 한다. 비전을 가진 지도자와 건전한 비판, 합리적인 판단,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뽑은 지도자에게 퇴진을 요구하는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국민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리석은 다수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인지 모른다.
고한성. 재 뉴질랜드 언론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제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