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에 짓밟힌 민주화 염원 48년 만에 기지개
공권력에 짓밟힌 민주화 염원 48년 만에 기지개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6.11.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판 4·3’ 대만 2·28사건을 들여다 보다
국민당군 주민들 무차별 학살…38년 계엄령 후 진상규명·1997년 정부 공식 사과
▲ 2·28기념관 전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양윤경)가 지난 15일 대만 타이베이 2·28국가기념관(관장 양전뤙)을 방문, 화해와 상생을 위한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양민이 학살당한 대만 2·28사건은 제주판 4·3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본지는 대만 2·28을 재조명하면서 4·3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2·28사건의 발단=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대만을 일제에 빼앗겼다. 대만은 1945년 50년간의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당시 대만 인구 비율은 본성인 84%, 외성인 14%, 원주민 2%로 구성됐다.
 
본성인(本省人)은 명과 청나라 시절 대만에서 터전을 잡은 초기 이주자다. 외성인(外省人)은 광복을 맞이한 후 중국 대륙에서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외성인은 숫자가 적었지만 국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위직을 차지하는 등 기득권층을 이뤘다.
 
더구나 대만 행정장관 천이는 강력한 수탈과 차별 정책을 폈다. 담배·설탕·차·종이·시멘트 등을 국유화해 상당한 물자를 공산당과 내전 중이던 본토의 국민당으로 보냈다.
 
물자 부족과 부패가 맞물려 물가는 수십, 수백 배로 뛰어올랐다.
 
발단은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노상에서 허가 없이 담배를 팔던 린쟝마이라는 과부가 전매청 공무원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한 데서 비롯됐다.
 
주변 시민들은 과격한 단속에 항의를 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한 총에 본성인 출신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다음 날인 2월 28일 분노한 군중들이 봉기해 경찰서에 난입한 데 이어 행정장관청으로 몰려갔으나 기관총 세례를 받으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대만 전역에서 파업과 항쟁이 벌어졌다.
 
무차별 발포를 계기로 타이베이시 의회를 주축으로 2·28사건처리위원회가 구성돼 자치와 인권 보장 등 근본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 지난 15일 4·3유족회원들이 타이베이 2·28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은 희생자 얼굴과 함께 많은 지식인들이 처형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직업을 표기했다.
▲진압과 학살=천이 행정장관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 민중 항쟁에 대해 장제스(장개석) 총통에게 정부 전복 시도라고 보고하고,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1947년 3월 국공내전 중임에도 장제스는 2개 사단(국민당군) 병력을 파견했다. 국민당군은 본성인에 대해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섬 전체가 초토화됐다.
 
특히 사건처리위원회 구성원인 사법·행정·언론·교육계 지식인들도 처형했다. 그해 5월 16일 장제스는 사태 종료를 선언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38년 동안 금기=1949년 대만 전역에 내려진 계엄령은 1987년까지 38년간 이어져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을 선포했다.
 
2·28사건은 최대의 금기였고, 이를 언급하면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철저하게 잊혀 진 사건이 됐다.
계엄령 해제 후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됐다. 대만 출신인 리덩후이 총통은 1995년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했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 정부는 공식적인 사죄와 함께 타이베이에 2·28기념비를 설치했다. 2007년에는 2·28국가기념관을 건립했다.
 
1992년 행정원이 발표한 2·28사건 연구보고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1만8000~2만8000명으로 추산했다.
 
▲ 국민당군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이중으로 벽돌을 쌓은 62㎝의 좁은 밀실에서 2·28에 가담했던 쒸루쩐이가 17년간 숨어 지냈던 모습을 재현한 모습.
▲국가기념일 선포와 배상=대만 정부는 1997년 2·28을 국가기념일(공휴일)로 지정해 해마다 국가원수인 총통이 참석해 추모를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2014년에야 4·3을 국기기념일로 지정했다.
 
대만은 1995년 이미 배·보상 조례를 제정했다. 사망·실종자는 평균 2억원, 구금은 형량에 따라 최고 1억7000만원에서 최저 2000만원을 지급했다.
 
유족과 자녀에는 대학까지 학비 전액 면제, 취업 알선, 의료비 지원 등으로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현재 진행형이며, 지금까지 2266명에게 총 2530억원을 지급했다.
 
▲ 2·28사건의 상징물인 어머니와 아들의 조각상. 남편을 잃은 아내는 4남매를 바닷가에서 익사시키고 자결하려 했으나세 살배기 막내아들이 먹을거리로 게를 줍고 오면서 엄마의 마음을 바꿔 놓아 가족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2·28국가기념관은 독재 정권 하의 억압과 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다 희생당한 지식인들과 학살당한 양민을 기리고 추모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양윤경 회장은 “유족회의 이번 방문은 큰 아픔을 겪었던 이웃나라끼리 과거사를 재조명하고 공유하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며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배상으로 앞서가는 2·28을 배우면서 4·3영령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됐고, 숙제를 안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대만 영화감독 허샤오시엔은 1989년 2·28사건을 다룬 첫 영화 ‘비정성시’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다.
 
 
▲ 양전뤙 2·28국가기념관장.
⇒양전뤙 2·28국가기념관장 인터뷰
 
▲2·28사건에 대해 말해 달라=2·28사건의 본질은 무차별 학살이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온 국민당군은 마치 진압군이나 다름없었다. 예를 들어 국민당군은 포구에 도착하기 전 나루에 있던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총살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사람들을 체포하고, 판결 없이 처형했다.
 
이 사건은 금기시 돼 어떻게 죽음을 당했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유족들은 말을 하지 못했다. 왜 정권(정부)이 국민을 잔혹하게 대할 수 있느냐. 대만 2·28과 제주 4·3은 배경과 역사가 비슷하다. 그래서 유족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배상은 어떻게 진행됐나=(1995년 조례 제정으로) 처음에는 보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배상으로 바로잡게 됐다. 12년에 걸쳐 목표를 이뤄냈다.
 
배상은 기념재단에서 해주지만 법적인 입증이 필요하다. 문제는 재판 없이 죽임을 당하면서 법적인 입증은 굉장히 복잡해졌다.
 
40년이 지나서 배상업무를 시작해 유족들은 증거 제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목격과 진술, 책(증언록) 등이 증거자료가 되고 있다.
 
힘든 작업인 만큼 배상 신청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5년마다 배상업무가 이뤄지고 있다.
 
4·3유족회에도 앞으로 닥칠 문제다. 입증이 문제다. 이게 과제인 만큼 지혜롭게 풀어가야 한다.
 
▲희생자는 어떻게 추산했나=희생자 숫자는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출생, 자연사, 질병 등 인구 증감을 고려했다. 여기에 국민당군의 총알 수량까지 파악했다 과학적인 수치로 접근해 1만8000~2만8000명의 희생당한 인원이 나온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는=대만 2·28은 제주4·3과 마찬가지로 가해자는 정부다. 정부 입장에서 배상 문제는 개운하지 않고 꺼려하는 입장이다. 과거 2·28사건 진상규명 운동할 때 제기한 문제에 대해 정부는 다 받아주질 않았다. 특히 정부의 입장은 배상을 해줬으니 다른 것은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집권당(국민당 또는 민진당)에 따라 기념사업이 달라질 수 있다. 유족 스스로가 힘을 갖춰야 정부에 제대로 요구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