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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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수필가

우연히 12년 전에 방영됐던 한 드라마에 사로잡혔다. 남자 주인공의 말투와 성격, 그의 사랑법에 매료되어 이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하며 20화를 모두 보았다. 평소에는 텔레비전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가 드라마에 정신을 놓고 있으니 가족들은 의아해 했다. 막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내뱉었다.


“엄마, 예전에는 드라마 보는 사람들을 폄하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드라마 대본 연구 중이야.”


얼떨결에 내놓은 궁색한 변명은 부끄러운 지난 기억들을 불러왔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 다음 날이었다. 목소리에 날을 세워 남편에게 잔소리를 쏟아놓았다. 웃기만 하던 남편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놓는 말 꼬리를 잘라가며 코너로 몰았다. 내가 확실한 승기를 잡고 의기양양 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큰애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빠, 우리 집은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니에요?”


느닷없는 큰애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황스러웠다. 평소 아이들에게 사자소학을 읽히며 바른생활 규범과 어른 공경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나. 그런 내가 보여준 행동이라고는 ….


남편이 능청스럽게 대답을 했다.


“오늘은 앞 뒤 ‘부’가 바뀐 것 같네.” 


둘째의 일기장에도 민낯의 내가 있었다.

 

2010년 2월 25일


제목 : 행복 + 억울하다

오늘 나는 행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제가 좋은 일을 했어요. 어학원에서 내려오는데, 어떤 애랑 그 애 엄마 같은 분이 있었는데 …"


  그런데 엄마는


  “조용히 안 해? 이 Bird끼야!!”


  난 너무 억울했다. 왜 날 욕했는지 모르겠다.

 

학원에서 상담전화를 받고 있을 때였다.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둘째가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뭐라고 떠들었다.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몇 차례 보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화가 난 내가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녀석에게 공포탄을 날렸다. “조용히 안 해? 이 놈의 새끼!”


그날 밤 아이의 일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의 곱지 않은 말이 ‘Bird끼야’로 기록된 것이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에 ‘Bird끼야’가 뭐냐고 묻자, ‘이 놈의 새끼’인데 욕을 쓰면 안 되니 ‘놈’은 빼고 ‘새끼’의 ‘새’를 영어로 에둘렀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욕 금지령을 내려놓은 나의 어불성설. 그 일이 있고 난 뒤 둘째는 나를 욕의 황후로까지 등극시켜버렸다.


막내를 통해서도 나를 볼 수 있었다.


아홉 살, 여섯 살, 다섯 살이던 삼형제는 사이좋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티격태격했다. 그럴 때 마다 중재를 하거나 꾸짖어보지만 그때뿐이었다. 해결책으로 형제끼리 존댓말을 쓰도록 했다. 존댓말 쓰기는 내 기대보다 효과가 컸다. 큰애는 의젓해졌고 동생들은 더 이상 형에게 덤비지 않았다. 연년생인 둘째와 막내사이에도 확실하게 서열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과 나의 대화를 듣던 막내가 끼어들었다.


“엄마, 어른이 되면 제가 작은 형한테 반말해도 돼요?”


“그건 안 되지. 근데, 왜?”


“엄마는 아빠보다 네 살 적은데 반말하잖아요.”


 
아이들은 분명 나를 비추는 거울임에 틀림없다. 드라마에 빠진 내 모습을 ‘대본 연구 중’이라고 둘러댄 걸 아이가 몰랐을까. ‘나의 소신’이라고 했던 것들에 대한 불합리가 비춰질 때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거울이 어찌 아이들의 눈뿐일까. 간혹은 다른 이의 모습에서 나를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모습이라 여겼던 것들이 내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내 안의 허물과 욕심, 내 중심적인 생각들이 종종 관계의 거울을 통해 드러난다.


산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며 다듬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은 그 자체가 거울인 게다. 그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어 부지불식중에 행해지는 의식까지 속속들이 비추는 거울. 순간, 움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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