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는 향리들의 집무청으로 관덕정 서쪽에 있던 주사(州司) 건물에 유리문을 달고 제주면사무소로 이용했다. 1913년부터 1931년까지 18년 동안 사용된 이 건물은 제주시청사의 효시로 꼽힌다.


향리(鄕吏)는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 행정실무를 담당해왔다.

향리의 집무청인 사(司)는 모든 지방에 관리가 파견되지 않았던 고려시대부터 설치됐다.

향리들은 사(司)에 모여 그 지역의 일을 논의했다. 고을 단위에 따라 주사(州司), 군사(郡司), 현사(縣司) 등으로 구분됐다. 제주에는 주사(州司)가 들어섰다.

조선시대 중앙 집권화로 전국의 지방에 중앙 관리가 파견되면서 주사는 관아시설로 편입돼 작청(作廳)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향리를 대개 아전(衙前)으로 불렀다. 지방 수령이 근무하는 관아(官衙) 앞에 이들이 근무하는 곳이 있어서 ‘아전’이라 부른 것이다.

향리는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층으로 실제적인 사무는 이들의 손에서 처리됐다.

예로부터 향리들이 근무했던 주사는 지금의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 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주사는 땔감이나 쌓아 두고 관아에서 거둬들인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 향리들이 관아시설로 편입되면서 주사의 역할이 축소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653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진이 쓴 탐리지에는 향리들의 집무청인 주사는 서문 안에 있었고 당시 땔감과 나무 막대를 보관했다고 기록했다.

증보 탐라지에서도 연료를 저장하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곳으로 서술했다.

 

   
▲ 1931년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자 일제가 주사 건물을 허물고 제주읍사무소를 서양식 청사로 신축한 모습.

조선시대 남정(男丁·젊은 사내) 한 사람이 매년 땔나무와 건초 한 단을 이곳에 바쳤다. 산촌의 경우 건초 대신 숯 5말을 거두어 받았다.

땔감을 저장하던 주사 건물은 제주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입춘굿의 발원지였다.

입춘이 오기 전 심방(무당) 100여 명이 주사에 모여 나무로 소(木牛·낭쉐)를 만드는 등 굿 준비를 했다.

입춘날이 되면 악대와 굿패가 악기를 불고 춤을 췄으며 목우를 끄는 심방이 뒤를 따르며 관덕정으로 행진했다.

입춘날 전 심방들이 주사에 모인 이유는 땔감 저장고인 주사에 항상 목재가 쌓여 있어서 목우 제작에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주사 건물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행정관청으로 다시 부활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가 다스렸던 제주목(濟州牧)은 1906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두면서 제주군(濟州郡)으로 바뀌었다. 당시 제주군 중면(中面)이 오늘날 제주시지역이었다.

1913년 중면은 제주면으로 개칭됐다. 기와집이던 주사 건물은 제주면사무소로 이용됐다. 이에 따라 제주시청사의 효시는 향리들이 근무했던 주사 건물에서 시작됐다.

주사 건물에 들어섰던 면사무소는 제주읍으로 승격되던 1931까지 18년 동인 사용됐다.

일제는 1931년 이후 기와집이던 제주면사무소를 허물고 서양식 청사를 신축해 제주읍사무소를 설치했다.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면서 주사 건물이 있던 자리는 또 다시 신축 청사가 들어섰다.

공사는 1958년 시작해 이듬해인 1959년 10월 준공됐다. 2549㎡ 부지에 연면적 1707㎡의 2층 규모로 신축됐다.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을 이용하면서 당시만 해도 도내에서 몇 안 되는 근대 건축물이었다.

근대 건축가인 박진후씨가 도내에서 처음 설계한 건축물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았다.

 

   
▲ 1955년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면서 읍사무소 건물을 허물어 신축한 제주시청사 전경. 1980년까지 시청사로 이용됐다.

그러나 2012년 말 철거돼 지금은 관덕정 및 제주목 관아 방문객을 위한 공영주차장으로 조성됐다.

향리들의 집무청인 주사(州司)는 제주면사무소, 제주읍사무소를 거쳐 제주시청사가 들어섰으나 문화유산으로 오르지 못해 채 허물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