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함박이굴' 유년의 4.3기억 세상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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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고문에도 펜대 꺾지 않아...도민의 한 풀어줘
자전적 소설 '지상에…' 펴내며 스테니셀러…작가 출신 문화예원장 선임
▲ 현기영 작가와 부인 양정자씨가 경기 분당 아파트(자택)에서 제주 출신 강요배 화백의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다. 서울대 학과 동기인 부인 양정자씨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도민들에게 4·3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이었다. 가족들이 몰살당했지만 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어리둥절했다. 비참하고 억울한 기억을 간직한 채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울분을 토해야 했지만 독재 정권시절엔 발설을 하지 못했다. 금기가 지배했던 시절, 현기영 작가는 문학을 통해 4·3을 세상에 처음 발설했다.

그가 쓴 소설은 음울한 공기가 깔려있던 시대에 숨통을 틔워줬다. 참혹한 시절을 겪고도 억압과 핍박을 받아야 했던 도민들의 분노와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줬다.

▲가난한 시절, 문학도를 꿈꾸다=현 작가는 1941년 제주시 노형동 ‘함박이굴’ 마을에서 출생했다. 지금은 늘봄가든이라는 음식점이 들어선 곳이 그의 고향이다.

4·3당시 노형마을은 확인된 사망자만 560명에 달할 만큼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그가 쓴 순이 삼촌에서 ‘서촌마을’은 고향인 노형과 조천읍 북촌마을을 아우른 가상의 공간이다.

1947년 함박초등학교(노형초등학교 전신)에 입학했으나 그해 3·1사건과 3·10총파업으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가족들은 제주시 성내골(현 삼도2동 무근성)로 이사를 가면서 광풍을 피해갔다. 그는 성내골과 용담동 정뜨르마을에 살면서 제주북초, 오현중, 오현고를 졸업했다.

오현중 1학년 당시 응모한 ‘어머니와 어머니’는 제주도 학생문예대회에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전국학도호국단이 주최한 문예대회에선 ‘행군 소리’로 2등을 차지했다.

오현중 국어 교사이자 문학청년인 김영돈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집에 소장해 놓은 많은 책을 빌려줬다.

그는 오현고 2학년 때부터 서울대에 가기 위해 과외교사를 하며 학비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이 돈을 가로채 탕진해 버렸다. ‘족은 각시(첩)’와 살며 가족을 팽개쳐버린 부친과 어린 시절 불우했던 자화상을 그린 소설이 ‘지상에 숟가락 하나’다.

가정 형편으로 남들보다 1년 늦게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로 진학한 그는 당장 생계가 급했다. 자연스럽게 입주 가정교사를 했다.

“입주 가정교사에게 선생님이라 불러주고 밥도 먹여줬지만 실은 계약된 머슴이었죠. 섬 놈 근성과 자존심 때문에 1년 만에 때려치우고 친구들의 하숙집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면서 1년을 더 버텨냈죠.”

해병대를 제대한 후 그는 고집이 센 ‘섬 놈 근성’을 버리고 학생과 함께 잠을 자며 입주 가정교사 노릇에 충실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 광신중학교에 이어 서울대 사대부속중·고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교단에 몸담았다.

“교직에 20년 있으면 연금 절반이 나옵니다. 나이는 먹어가는 데 문학에 목이 메말랐죠. 1987년에 교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죠.”

 

▲ 서울사대부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가을 소풍에서 학생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기억의 투쟁, 혹독한 대가를 치르다=그는 전업 작가가 되기 전, 교사로 재직하던 1978년 ‘순이 삼춘’을 발표했다.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이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자살한다는 내용이 줄거리다. 4·3에 대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순이 삼촌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처음 실렸어요. ‘잡혀가면 어떡하지’ 마음을 졸였지만 처음엔 아무 반응이 없었죠. 그래서 4·3을 주제로 한 ‘도령마루의 까마귀’와 ‘해룡이야기’를 잇따라 잡지에 발표했죠. 4·3에 대해 글을 쓰니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제주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 제 주변에 모여들었죠. 한 달에 한번 이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제주사투리로 4·3에 대해 토론했죠.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죠.”

잡지에 발표된 순이 삼촌은 1979년 책으로 출간됐다. 그해 11월 그는 서울에 있는 빵집에서 동아리 모임 회원들에게 책을 나눠줬다. 그런데 일부 회원이 명동 YWCA회관에서 열린 위장 결혼식에 참석했다. 위장 결혼식은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치르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반발,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였다. 계엄 상황이어서 군·경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결혼식을 위장해 시위를 벌였다.

경찰에 연행된 집회 참석자의 가방에서 ‘순이 삼촌’ 소설이 나왔다. 그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빳다’를 맞아본 해병대 출신이라 맷집에는 자신이 있었죠. 그런데 고문기술자들이 사흘간 매질을 해대는데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경험을 했죠. 온 몸이 잉크빛으로 퍼렇게 변했고, 더 이상 때릴 곳이 없게 되자 싸릿대로 손등을 때렸죠.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 나왔죠.”

골수를 흔들어대고 뼈와 내장을 후벼 파는 혹독한 고통의 매질을 당한 그는 25일간 서울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경찰은 그의 몸에서 멍 자국이 사라지자 풀어줬다.

매타작을 당한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젊은 군인과 순경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1980년 한해는 절필을 하며 술로 시름을 달랬다.

그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종로경찰서에 잡혀갔다. 이번엔 판금(판매금지) 조치된 책이 유통되고 있다는 이유였다. 개처럼 고문을 당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경찰서 2층에서 투신하려고 했다.

다행히 치도곤을 당하지 않고 20일간 유치장에 구류됐다.

“당국은 나를 기소하면 금기시 됐던 4·3이 재판과정에서 발산된 것을 우려해 그냥 집으로 보내줬죠. 내가 처벌받으면 4·3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돼 재판에 회부하지 않은 거죠. 훗날 고문기술자로부터 전화가 왔죠. 저승사자 목소리처럼 들렸죠. ‘그 때 그 책은 어떻게 됐어’라고 묻길래 ‘재판에 들어갔다’고 했죠. ‘어, 재판은 안 하기로 했는데’라며 놀라는 거예요. 나는 순이 삼촌이 초판을 다 찍어서 재판(再版)을 찍었다고 얘기한 것을 그 사람은 재판(裁判)에 넘겨진 걸로 오해 한 것이죠.”

슬픔과 울분에 쌓여 술로 지내던 그는 마음을 고쳐 잡았다. 왜 4·3이 발생해 민중이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역사를 추적하기로 했다.

 

▲ 1990년대 4·3연구소 회원들과 유적지 탐방에 나선 현기영 작가(왼쪽 세 번째).

4·3의 모티브가 된 제주 민초들의 항쟁을 글로 옮겼다. 구한말 제주 민란(이재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1983년 발표했다. 치밀한 고증과 연구를 거쳐 소설을 완성해 민중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섬세한 필치로 되살려놓았다.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은 4·3의 전사(前史)였죠. 중앙 정권의 부당하고 가혹한 탄압이 있으면 가가호호에서 남정 한 명씩을 차출했죠. 관덕정광장은 물론 집 울담이 무너질 정도로 제주성내는 항쟁에 가담한 사람들로 미어터졌죠. 선조들은 탄압과 수탈에 맞서야 한다는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현 작가는 1999년 자전적 성장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내놓았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권장도서로 선정돼 스테디셀러가 됐다. 지금까지 45만권이 팔렸다. 그는 인세(印稅)로 받은 2억원을 사랑의 열매에 기부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2008년 불온서적으로 지정, 병영 도서관에 비치하지 못하도록 했다.

국방부는 이 책에 북한 찬양 문건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문학계는 4·3때 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표현이 있어서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예술원장에 오르다=현 작가는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맡았다.

문화예술진흥원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 관료였다. 그는 작가로서 처음엔 공직에 몸담았다는 게 부끄럽다고 여겼다.

“그래서 취임식 다음날 문화관광부로 찾아가 국장들에게 얘기했죠. ‘문화예술진흥원은 문광부와 종속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라며 큰 소리로 다짐을 해놓았죠.”

당시 4300억원이 넘는 문예진흥기금을 각종 예술단체에 배분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연극·미술·음악·무용 등 각계 예술단체장들은 그를 만나러 오기 전 4·3에 대해 공부를 하고 왔다. 당시 문화·예술계에선 4·3을 알고 배우려는 붐이 일었다.

“사실 내가 문화예술진흥원장이 된 것은 이 조직을 해체하려고 온 것이죠. 그동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수혜를 받기 위해 예술인들이 줄을 서거나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작품활동을 하는 것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개혁 작업은 결실을 맺었다. 그가 떠날 때에는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새 간판을 달았다.

위원회가 되면서 현장의 예술인들로 구성된 10명의 민간위원들의 합의를 통해 문화예술 정책을 이끌어 가게 됐다. 예술인들이 일방적인 수혜자에서 정책 입안자가 된 것이다.

 

▲ 2012년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사진 가운데)가 북촌 너븐숭이를 방문하자 현기영 작가(왼쪽)가 4·3당시 이곳에 벌어진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 자본에 종속 되선 안 돼=치열하고 격정적으로 살아왔던 현 작가는 일흔 다섯으로 노년을 맞이했다. 지금은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동기로 평생의 동반자이자 시인인 부인 양정자씨가 손자들과 지내고 싶어해서 분당에 터전을 잡았다.

타향에 살면서도 그는 제주의 미래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다.

“중국인들이 제주로 밀려오고 땅을 사들이고 있다죠. 제주마저 돈에 종속되는 물신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죠. 중국인들이 산 땅과 건물에 관광객들을 수용하게 되면 제주가 중국 자본에 종속될 수 있죠. 동남아나 샌프란시스코, 밴쿠버처럼 제주 역시 화교들이 지역경제를 주름잡는 상황이 벌어져선 안 됩니다.”

현 작가는 제주의 순수한 자연에 대해 정체성을 지켜줄 것을 강조했다. “제주는 태고적부터 간직해 온 그대로의 자연 덕분에 전 세계인들을 반하게 만들었죠. 천혜의 자연이 가공되고 왜곡되면 관광지라는 메리트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는 그 어떤 것에서도 종속돼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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