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읍지 출판회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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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흡.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조사위원

날씨 화창한 지난 11월 18일 나는 대정읍지 출판기념식 및 기념 조형물 제막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가졌다.

평소 향토문화를 굴착(掘鑿)한다거나 향토역사를 탐색(探索)하는 버릇이 늘 나를 눌러 이런 모임에는 퍽 즐겨 참석하기도 한다. 80대 중반에 이른 이 늙은이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갔었다.

아는 이는 거의 없고 변정일 전 국회의원, 이용길 전 교수, 이군선 전 군수, 부오현 전 읍장 등만 지명도가 있을 뿐이다.

첫째 성대한 기념식에 이어 볼품 있는 기념 조형물의 모습과 이에 대한 주민의 관심에 나는 손뼉을 쳤다. 앞으로 여타 읍·면에서도 보급 전파될 행사라고 보아진다.

둘째 발간 읍지의 방대함과 사진자료와 사료(史料)의 열거에 경의를 표하면서 7년간 많은 인원을 동원해 이제 멋진 옥동자를 분만한 것이니 산모인 양신하(梁信河)편찬위원장의 산고(産苦)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

셋째 출판을 위해 읍민의 호응도가 대단하였다. 이 날 서울·부산 각지에서 참석했고 특히 기금을 기탁한 독지가(篤志家)가 많고 희사금도 많았다.

더구나 이 날 주민들이 ‘방어축제’를 열어 제주 미식가들이 많이 모여 온통 축제분위기를 띄웠다는 사실이다.

대정(大靜)은 우리나라 북쪽 끝 삼수(三水)·갑산(甲山)과 함께 유배의 극악지(極惡地)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서 제주 어느 곳보다 유배문화가 독특하며 더구나 멀리 서구(西歐)와 일본(日本)의 중간 항로(航路)지점 이어서 해양문화의 잔해(殘骸)가 남아 있다.

그런 환경에서 대정주민들은 행정이 문란하면 즉시 이에 저항하는 주먹을 휘둘렀다. 근현대(近現代) 사실(史實)만 보아도 강제검(姜悌儉)난, 이는 농민의 저항이고 또 1901년 이재수(李在守)난, 이는 반천주교 저항이고 1948년 4·3사건도 이 고장에서 주먹을 먼저 날렸다.

일제 강점기 일본 사상범을 다루는 경찰을 특고(特高)형사라고 하는데 그들끼리 부르는 유행어가 만연(滿然)했다. “ ‘아다마 頭의 조천’, ‘우데 腕의 대정’ 조천의 항일운동가는 두뇌로 싸우고, 대정사람들은 완력(腕力)으로 한다. 그러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구치 口의 애월’, 애월면의 운동가는 구변으로, ‘하라 腹의 중문’ 중문면의 운동가는 배짱으로 저항, ‘짐뽀 男根는 한림의 운동이니 항일농민조합이요’, ’큐샤(舊左)의 오메고 女根 는 구좌의 운동여성, 곧 해녀항쟁이니 이들을 조심하라. 나머지 읍면은 보잘 것 없다”라고 까불거렸다고 전해진다.

처음 대정땅을 밟아본 것은 제주농중3학년 때 도일주(島一周) 원보훈련 시에 들려 대정초의 교실에서 잤던 것이다. 그 뒤 6·25직후 고등학교 3학년 때 모슬포 제1훈련소의 체육대회 (연대별 대항)에 벗 몇 명과 참관한 일이다.

110세를 사신 고부이씨 할머니의 고향도 찾아보고, 후일 교육계에 투신, 제주일고 교감일 때 학력고사에서 원희룡(元喜龍)군이 수석을 하니 문교부 특명으로 교장이 되어 우도중교장 2년을 하고 성산중, 또 서귀여고 교장으로 정의(旌義)지방의 문화·지리에 접하고, 대정지방 교장으로 가서 그 지방을 알고 싶은 욕구가 충만한 가운데 갑자기 북제주교육장으로 발령되어 대정을 체험하지 못하고 이제 이 책을 받아 나의 독서벽(讀書癖)을 충족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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