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역사의 기록, 지서(支署)의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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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의사/논설위원

4·3당시 조천지서와 조천리는 좌익·우익이 극명하게 대립했던 곳이다. 조천지소는 4·3 당시 경찰과 응원대의 활동 근거지였는데, 피의자에 대한 취조와 학살이 자행된 곳이면서, 무장폭도들에 의해 세 번에 걸쳐 기습당한 곳이었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쯤 무장한 폭도 40여 명이 조천지서를 처음 기습했다. 이때 경비중인 김동섭 순경이 선제 사격하자 폭도들이 도망쳤다. 다음 날 밤 1시쯤 2차 습격에 경찰은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 격전 끝에 폭도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경찰관 2명이 부상 당했다. 4월 14일 밤 지서는 폭도들의 3차 습격을 용케 방어해냈다.

지서공격을 포기한 무장폭도들은 11월 4일 밤 조천리를 급습하여 조천면사무소를 불태웠고, 11월 11일에도 연달아 마을을 습격했다. 또 12월 20일 밤에도 쳐들어와 민보단장의 부모와 동생 등 3명을 죽창으로 살해했다.

12개 지서의 피습은 제주4·3사건의 시작이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치밀한 작전계획 아래 산하 무장대와 동조자들을 동원하여 경찰관과 그 가족과 보조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5·10 선거관련 업무 종사자들과 우익 청년단체 임원들에게 테러를 감행했다.

남로당의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4월 3일 오전 2~4시 사이 무장대 350명이 12곳 지서를 일시에 급습했다.

제주읍의 삼양지서,화북지서, 외도지서, 애월면의 구엄지서, 애월지서, 한림면의 한림지서, 대정면의 대정지서, 남원면의 남원지서, 성산면의 성산포지서, 구좌면의 세화지서, 조천면의 조천지서, 함덕지서 등이었다.

우익의 인피(사망 27, 부상 8, 포로 5명)와 물피(지서 방화와 파괴, 일반 가옥 소각, 무기노획)는 극심했다. 각 지역의 지서는 광복 후 건국의 기반이었던 공권력의 혼이 담긴 터전이었다. 이 12곳은 4·3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의 발발지점이었으며 진상 규명의 실마리를 풀어줄 역사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2003년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의 도내 4·3유적지 기초조사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좌편향으로 치닫는 시대에 좌익이 범람하는 제주도에서 제주4·3사건 관련 유적지는 대부분 강경진압과 관련된 피해 현장이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비)들로 지정됐고 유적시설관리보조금도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4·3당시 폭도에 의해 순직한 경찰관과 무고하게 희생된 지역 주민들을 추모하는 유적지에 관심 두는 이가 없었다. 당시의 경관들을 가해자로 정의하려는 자들에게서 올바른 4·3기념 사업은 나올 수가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민간단체인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와 제주4·3경찰유족회는 국가정체성을 찾고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목표로 지서 옛터에 추모·표지석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사업은 국가안보와 지역치안 유지에 소임을 다한 경찰관의 숭고한 뜻을 추모하고, 그들이 봉직했던 관서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나아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의 아픔과 역사적 의의를 고찰하고, 그 뜻을 되새기고 잊지 말아 지역주민과 국민의 나라사랑 애국심을 함양하고자 한 것이다. 지서표석세우기 사업은 지난 11월 29일 조천지서에서 그 대미를 장식했다.

이 작업은 단순한 표석세우기에 불과했지만, 알만한 사람까지도 설립 제안에 반대하고 심지어 훼방까지 하였다고 한다. 지난 1년간 이 작업에는 많은 분들의 노고와 눈물이 점철해 있다. 제주4·3정립 연구·유족회, 제주4·3경찰유족회가 주관하고 4·3유족들, 안보단체의 어르신들이 성금 모금에 앞장서고 독려해 주었다. 사라져서는 안 될 아픈 역사를 새기기 위해서 애쓰시는 분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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