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산담을 쌓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로 조직된 산담접은 열악한 경제 활동 타개책으로 농한기를 이용해 부업 활동을 하거나 친목을 도모했던 임의조직으로 1940년대 결성됐고 1970년대 이후 대부분 해체됐다. 사진은 산담을 쌓는 모습.

 

▲산담접이란=산담을 쌓을 때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공동체가 알아서 장례를 치러주는데 장례 당일 마을 청년들이 산담을 쌓아주기도 했다. 장례 당일에 산담을 쌓으려면 산자리(무덤 자리) 옆으로 돌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경우라야 한다. 만일 어떤 집안에 연로한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장례 때를 생각하여 미리 밭에 조성해둔 머들이나 잣벡을 허물고 산자리 가까운 곳으로 돌을 날라다 두어야 한다.

 

과거에는 한 동네에서 상례가 나면 장례 절차 모두를 향장(鄕葬)의 방식으로 치러졌다. 향장이란 마을에 상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다들엉(함께) 운구, 매장, 봉분, 축담(산담 축조)에 이르기까지 당일에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사 때 참여하는 것을 일러 ‘일을 돌 본다’라고 했다.

 

궂은일을 돌본다는 것은 상부상조 개념의 수눌음의 한 방편이다. 장례는 특히 동네 청·장년들이 중심이 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산담까지 마무리를 했다. 그러나 점점 시대가 바뀌고 점차 일이 분업화되면서 전문적으로 산담을 쌓는 조직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산담접이나 전업 석공조직이다. 지금은 산담을 쌓는 일이 없지만 각 가정에서는 조상의 무덤에 산담 쌓는 일을 늘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여유가 생기면 무덤마다 산담을 쌓았다.  

 

‘산담접’은 산담을 쌓기 위해 임의로 조직된 계모임을 말한다. 접이나 계를 ‘제’라고 한다.


‘제주도 접·계  문화조사보고서’ 에 의하면, 구좌읍 평대리 중동네 산담접은 7인이 모여 1940년 무렵에 결성하여 1970년 무렵에 해산되었다. 접원의 집에 상을 당했을 때 접원의 노동력을 동원해 산담을 쌓아주고 가정 경제에 도움을 주면서 서로 간 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자본금이 늘어 가면 돼지를 잡아 돗추렴을 하기도 하고 상복용 삼베를 사서 나누기도 하였다.

 

조직의 구성은 으뜸(元位)이라고 하여 제일 고령자가 책임을 지고, 임기는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했다. 으뜸 아래 공원(公員)이라고 하여, 통솔력과 학식이 있어야 하며 작업반장과 재무 역할을 담당했다. 소임(所任)은 연락과 동원책임, 그리고 잔심부름 등을 맡는다. 정기 모임은 12월 말에 결산보고를 한다. 점원들이 나이가 많아지면서 노동력이 약해짐에 따라 서서히 사라졌다.

 

과거에는 대개 마을마다 산담접이 있어 농한기를 이용해 돈벌이하거나 친목을 도모하였다. 제주 마을의 산담접 사례 중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산담이 점차 사라지면서 산담접을 볼 수 있는 풍경도 크게 줄었다. 산담을 쌓던 사람들은 겨우 집울타리 돌담이나 밭담을 쌓을 때나 볼 수 있다.

▲제주 마을의 장례 관련 접=수산리의 산답접인 경우, 고학선 외 10여 인이 모여 1960년대에 결성됐다. 접원은 노동력이 강한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그 구성원들은 주특기가 있거나 돌을 깰 때 쓰는 야(메), 우겟노(큰 돌망치), 겟노(돌 다듬는 도구)와 같은 석공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접의 대표는 집강(執綱)이라고 하며 결산 시 1찍(분배 시 10%)을 더 받는다. 산담을 쌓을 때 음식은 산담 의뢰자가 부담하며, 섣달 그믐날에 결산하고 명절 제수용으로 소 한 마리를 추렴한다.

 

신풍리인 산담접인 경우, 산담의 의뢰를 접원에 의해서가 아닌 직접 타인으로부터 의뢰를 받았을 때는 접원 모두의 찬성으로 결정한다. 접원이 부모상을 당하면 접원들이 협동하여 산담을 무상으로 쌓아준다. 산담 쌓아 번 이익금은 공동 자산이 된다.

 

표선면 표선리 산담접은 1960년대에 결성하여 1980년대에 해산했다. 접원은 돌쌓기 기술을 가진 사람끼리 결성했다. 연말 돗추렴 시 회장과 재무에게 수고비로 고기를 약간 더 주었다. 접은 공동묘지가 생기면서 일거리가 없어 해체되었고 규약도 그때 불태웠으며 남은 돈은 공동으로 똑같이 분배했다.

 

성읍리 동상동의 이묘(移墓)접은 1960년대에 결성하고 1974년대에 해체됐다. 말 그대로 철리(移葬·이장의 제주어)하는 것을 전문으로 한 모임에서 출발해 철리 후 산담까지 맡아 일했다. 일에 비용은 소 한 마리 값을 받았다. 당시 소 값은 현시세로 치면 200만 원 선이다. 산담 한 건마다 수익을 분배했고, 연말 결산 시 소임과 총무에게 하루 일당(당시 7000원) 정도의 수고비를 더 주었다.

 

토산 1리 산담접은 1950년대부터 금까지 존속한다. 접원은 10인 정도, 접이 생기던 초창기에 산담을 해주고 떡 등으로 임금을 받았다. 접은 잘 되는 편이어서 1년에 여러 번 소나 돼지를 추렴했다. 대충하는 산담은 돈을 덜 받고 좋은 돌로 산담을 쌓게 되면 돈을 많이 받았는데 보통 300~400만 원 선이다. 요새 산담은 약 800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든다. 접원집에 일이 나면 부조금 정도 하고, 인근 마을인 삼달리, 하천리, 그등에(신산리)까지 일을 하러 다녔다.

 

애월읍 납읍리 산담계는 1956년에 결성하여 2008년까지 지속됐다. 재일교포가 산담을 부탁하면서 7명의 궨당(친척의 제주어)이 모임을 시작했다. 당시 산담 축조 비용은 3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모은 공금은 돈이 필요한 사람이나 계원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받으며 자금을 불려나갔다. 공금으로 하는 부조는 계원의 집에 일이 나면 1년에 한 번만 하였다. 부조는 백미 한 가마와 술 한 춘이었다. 책임자는 소임만 두고 한 사람이 계속 맡았다. 농한기인 12월에 정기모임을 하고, 2008년 해산할 때 100만원씩 나누어 가졌다.
 

▲산담접, 기금 마련 후 공동분배=대개 산담은 경제적 활동의 일환으로 청년 혹은 ‘돌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농번기를 중심으로 작업을 했다. 이익금은 공동분배가 기본이다. 어떤 마을의 접은 접원들에게 모은 돈을 빌려주어 이자를 받으면서 자산을 불리기도 했다. 이익금 분배는 대개 연말에 정산하는데 일정 금액으로 돗추렴을 하여 고기를 분배하였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대개의 접들은 1940년대부터 결성되었고, 1970년대 이후 대부분 해체되었다. 2008년에 해체된 곳, 그리고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산담접도 있다.

 

산담접을 결성한 목적은 열악한 가정생활 경제를 타개하기 위한 부업 돈벌이면서 친목도모하고, 계원의 상호부조를 위해서였다. 모두가 공동으로 일하고 접원들과 같이 돗추렴을 하여 보신하기도 했다. 산담접과 유사한 모임으로는 ‘역시계(役事契)’가 있었는데 이들도 산담이나 철리를 도맡아 했다. 상·장례 관련 계로는 화단제, 상여계, 장막계(천막을 빌려주는 계), 골계(상여를 매어 주는 계), 베제(삼베계), 호상옷제(멩지제·저승 갈 때 입는 옷으로 명주로 만든다) 등이 있다. 누구라도 제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큰일(상장 제례)의 부조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