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에 다니던 1973년 양의숙씨(오른쪽)와 남편 김홍식씨가 제주의 민가와 제주 궤를 조사하면서 찍은 사진.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이란 찻잔은 조선 초기 백자 사발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으로, 그 전까지 ‘막 사용한다’라는 의미로 조선인들은 ‘막사발’이라 불렀다.

그런 그릇이 일본으로 건너가 차 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국보급 찻잔이 됐다.

제주의 막사발 중에는 독특한 ‘눈사발’이 있다. 사발을 겹쳐 구울 때 눌러 붙지 않도록 사발 안에 모래를 뿌려서 사람 눈 모양의 자국이 남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 눈사발’은 고미술품 전문가인 양의숙씨의 연구로 재조명되고 있다.

▲대학원에서 장래의 꿈을 찾다=양 대표는 1946년 제주시 삼도2동 무근성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부친은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사업을 했다. 제주북초등교, 신성여중, 제주여고를 졸업했다.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이 4년제로 전환하면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기에 가정과에 입학했다.

당시 최옥자 학장은 제주여고, 부산여고, 전남여고 등 지방명이 붙은 명문 여고를 찾아가 장학생을 선발했다. 장학생이던 그는 대학에서도 교복을 입고, 빡빡한 수업을 받느라 혼쭐이 났다고 했다.

고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하며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원 공예과에 입학했다.

“그림도 잘 그려야 했지만 이론 시험을 잘 봐서 홍익대 대학원에 합격했죠. 대학원에선 다른 세상을 만난 것 같았고, 즐겁게 보냈죠.”

그는 대학원에서 예용해 선생의 ‘조선의 공예’ 강의를 수강하며 고미술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예용해 선생은 당시 강사 겸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으며 ‘인간문화재’를 제정한 민속학의 대가였다.

‘제주 반닫이’를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지도교수인 예용해 선생이 있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을 수시로 찾아갔다.

대학원 시절 제주도 전역의 가옥을 드나들며 300여 개의 반닫이를 탁본하고, 실측했다. 그가 쓴 석사 논문은 심사를 맡은 미술계 원로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제주 반닫이 논문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양 대표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28살에 경희대에 출강했다. 그런데 답사를 좋아하며, 후진을 양성하려던 그는 고민에 빠졌다.

“대학에서 13년간 강사를 했는데 저보다 10년 더 된 선배가 강사직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에서 유학한 새파랗게 젊은 애가 교수자리를 차지했죠. 미련을 훌훌 털고 대학을 떠난 후 고미술계에 전념하게 됐죠.”

홍익대 대학원 건축과에는 김홍식이라는 제주 출신 남학생이 있었다. 모임에서 양 대표와 자주 만나다 둘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양 대표의 남편 김홍식씨는 국내 최고의 한옥 권위자로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시 문화재위원에 이어 한울문화재연구원 대표를 맡은 그는 ‘한국의 민가’, ‘민족 건축론’을 저술해 서울대생 교양 필독서로 뽑혔다.

양 대표의 시아버지인 김한섭 선생은 중앙대 건축과 교수를 지낸 1세대 건축학자다.

고향인 제주에서 옛 남제주군청과 제주교대 본관동, 동양극장을 설계했다. 

양 대표의 시누이인 김용미 ㈜금성종합건축사무소 대표는 파리 7대학에서 박사학위와 프랑스 공인건축사를 취득해 전남도청, 광주광역시청사, 한성백제박물관을 설계한 유명 건축가다.

양 대표 소유의 선장헌과 스페이스 예나르 건물은 시누이이면서 국내 대표 여성 건축가인 김용미씨가 완성했다.

양 대표의 아들 김호민씨는 서울대 건축학과와 영국 명문 사립 AA스쿨을 졸업해 현재 영국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초가에 있는 300여 개의 반닫이를 조사 할 때 남편과 함께 동행했죠. 한옥과 전통 민가 전문가인 남편은 석사논문을 쓸 때 많은 도움을 줬죠.”

   
▲ 2010년 제주시 모충사에서 열린 추사 김정희가 의녀 김만덕의 공덕을 기려 쓴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세상에 널리 퍼져라)’ 편액을 양의숙씨(왼쪽)가 설명하고 있다. 김만덕의 6대손은 편액을 제주도에 기증했다.

▲고미술계의 여장부에 오르다=고미술 감정을 소재로 한 인기 프로그램 ‘TV 쇼 진품명품’은 1995년 첫 방송을 탔다. 그동안 사회자는 물론 PD, 감정위원 모두가 바뀌었다.

그는 1회부터 1070회가 넘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햇수로만 21년이 됐다. 청춘을 다 바친 셈이다.

“방송 체질이 아니어서 처음엔 극구 사양했죠. ‘고미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저 밖에 없다’며 PD가 간곡히 사정을 해서 출연을 했죠.”

그동안 전국 방방곳곳 600여 개 지역에서 출장 감정을 했다. 별의 별 에피소드가 나왔다.

별 게 아닐 것으로 갖고 온 골동품은 ‘고려역상감청자장고’로 드러나 1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반면, 유명 탤런트가 집 한 채 값을 들여 구입한 토기들이 모조품으로 밝혀졌다. 방송이 끝나서 왜 가짜인지 설득시켜줘야 했다.

이후 감정위원들은 방송 전·후로 의뢰인을 만나지 않는 게 ‘불문율’이 됐다.

한 의뢰인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며 고서를 들고 왔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집안의 ‘노비 문서’였다. 감정 내내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고대에 제작됐다는 화로를 들고 온 의뢰인이 있었죠. 사전에 명성과 소문이 대단해 진품명품이 끝나면 9시 뉴스에도 나올 예정이었죠. 그런데 별 볼일 없는 화로로 판명났죠. 뻥을 쳤다가 스스로 당한 셈이죠.”

   
▲ TV쇼 진품명품에서 출장 감정에 나선 양의숙씨.

▲고향 사랑, 유물을 기증하다=2006년 저지예술인마을에 입주 예술인이 된 양 대표는 인근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 개관 기념으로 ‘대원군 석란도’(33.5×116.5㎝)를 기증했다.

흥선대원군이(1820~1898)이 50대 후반에 그린 석란도(石蘭圖)는 도내에 기증된 고미술품 중 가치가 상당히 높았다.

양 대표는 지난 6월 김만덕기념관 개관 1주년에 맞춰 조선 정조시대 유배를 와서 제주 여인 홍윤애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조정철 목사(1751~1831)의 ‘정헌처감록(靜軒處坎錄)’을 기증했다.

정헌처감록은 조정철이 유배 생활 중 쓴 기사(記事)로 도내에는 원본이 없었다.

그는 “제주도립무용단이 공연한 ‘춤, 홍랑’을 감명 깊게 본 후 역사에 남을 순애보를 기록한 정헌처감록은 제주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렵게 구해 소장했던 고문서인 만큼 제주를 더 잘 알릴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첫 전시회를 열다=한국의 민속에 평생을 바친 그는 제주인의 옛 정취와 삶을 알리기 위해 스페이스 예나르에서 지난 10월 개관 기념 첫 전시회를 열었다.

40년 동안 수집한 반닫이를 비롯해 살레·이층농·발궤 등 고가구와 큰 달항아리 등 자기류, 제주민화 등 200여 점이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입장료를 받지 않고 한 달간 연 전시회에는 매일 100명 내외의 관람객이 찾으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지난달 11일부터 국내 최대 미술 경매회사인 서울옥션과 예나르가 협업해 김환기·박서보·장욱진·김창열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프린트 베이커리’ 기획전을 열고 있다.

양 대표는 내년 3월 한국화의 대가인 송영방 화백을 초청, 제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물 크로키전을 기획하고 있다.

   
▲ 제주산 굴무기(느티나무)로 만든 제주 반닫이는 소박하면서 거친 맛이 나는 고가구다. 양 대표는 이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굴무기’에서 제주의 가치를 찾다=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반닫이는 굴무기(느티나무 제주방언)를 도끼로 짜개고 자귀로 다듬어서 만들었다.

여인네들은 안방 머리맡에 반닫이를 놓고 패물과 제기 등 소중한 물건을 보관했다.

앞널이 반으로 열리는 장방형 궤인 제주 반닫이의 장식 변천사는 양 대표의 석사 논문 주제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 반닫이를 보고 비례감이 뛰어나고 소박하고 거친 맛이 있다는 얘기를 하자 속으로 웃었죠. 전문가 입장에선 장겹첩과 무쇠판, 들쇠 등 장식이 특별한데 사람들은 흔하디흔한 느티나무를 최고로 치는 거예요.”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는 깨닫게 됐다. 거친 돌밭에서 자란 제주의 굴무기(느티나무)는 여느 굴무기보다 옹골지고, 강한 것을 알게 됐다.

“가야금의 줄을 매는 바탕나무는 벼락 맞은 오동나무를 최고로 치죠. 벼락을 맞으면 단단하기가 그지없어서 옥탄금이라 불릴 정도로 소리가 굉장히 좋죠. 선조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제주 굴무기가 더욱 옹골지고 알차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우리만 몰랐던 셈이죠.”

양 대표는 제주다운 게 가장 좋고 우수한데 요즘 제주사람들은 외지인들의 가져온 문물에 빠져들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충고를 했다.

“제주인은 제주를 떠날 때 제주가 바로 보이죠. 제주다운 것이 가장 편했고, 가장 좋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