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방문해 조상묘에 잔을 올리는 모습(오른쪽서 두 번째).

“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라도 혼자 할 수는 없다. 조직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 같이 더불어서 노력하면 잘 될 수밖에 없다. 이 얘기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


제주 출신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유일하게 4성 장군인 육군 대장을 역임한 김인종 장군(71)이 후배들에게 전한 말이다.


그는 육사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한 이후부터 육군 대장에 오르기까지 단 한차례의 누락 없이 진급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경호처장으로서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했다.


그를 가리켜 주변에서는 “한마디로 뼛속까지 군인인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군인의 길을 걷다


김인종 장군은 1945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의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대정초와 대정중, 대정고를 졸업했다.


6·25 당시 육군 제1훈련소가 있었던 모슬포에서 자란 그에게 군인의 길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을 수도 있다.


고교 3학년이었던 1963년 8월 15일 학교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모집 포스터를 보게 됐고, 육사에 입교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육사 시험은 9월 하순, 40일 가량이 남았지만 그가 배운 고교 진도는 정확히 8월 중순 수준이었다.


당연히 배우지 않은 부분을 혼자 공부해야 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혼자 공부하고 모르는 내용은 밤에 선생님을 찾아가 배웠다. 그런 노력 끝에 육사에 합격했다.


시골 마을이었던 모슬포가 난리가 났다. 마을의 경사였다. 2차 시험을 보고 목포에서 배를 타고 와야 하는데 태풍으로 배가 뜨지 못하자 공군에서 비행기를 보내준다고 할 정도였다.


목표했던 육사에 입학했지만 위기가 찾아 왔다. 자신이 생각했던 군인의 길이 아니었다. 스스로 퇴교하려고 시험에서 백지를 냈다. 하지만 전체평균이 커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넘었다. 퇴교에 실패(?)한 것이다. 그는 부모님의 기대를 끝내 저버리지 못했고 군에 뿌리를 내렸다.

 

   
▲2008년 대통령 경호처장 임명장을 받는 모습,

▲작전·전략 전문가로 성장


1968년 임관해 소대장으로 철원에서 근무하던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월남전 참전을 위해 월남어를 배웠다. 통역관으로라도 참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전장에 도착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야전 소대장으로 배치됐다.


도착하자마자 ‘월남고참병’이라는 걸 만났다. 그는 “‘김 중위가 왔으니 우린 매복하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하더라, 기분이 매우 상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날부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대원들을 데리고 매복에 나갔다. 그러나 매복 군기가 문제였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나는 죽으러 온 게 아니라 살러 온 것이다”라고 일갈하고, 중대 베이스까지 포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2개월 반 정도를 매일 매복에 나갔고 포복으로 돌아왔다. ‘독종’이라는 소리와 함께 군기가 되살아났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수색작전 중 적이 쏜 총탄이 날아왔고, 수통에 맞아 튕기면서 목숨을 건졌다.


그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월남으로 복귀해 8개월을 더 근무했다. 그는 특히 임시대위를 달고 대대 작전장교 역할을 했다. 소령내지는 소령 예정자가 맡는 막중한 임무였지만 충실히 수행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의 작전·전략 능력이 빛을 발휘했다.

 

   
▲청와대 내 행사 때 모습(사진 오른쪽서 두 번째).

▲합리적 조직 관리


월남에서 복귀한 그는 중대장 거친 후 OAC(고등군사반교육)를 1등으로 마쳤다. 1등이라는 성적은 진급에도 큰 도움을 줬다.


소령으로 진급해 육사와 육군대학에서 훈육관으로 근무했다. 당시가 육사 32기부터 37기까지다. 박지만씨가 육사 37기다.


연대 작전주임, 대대장, 사단 작전참모 등을 거쳐 대령으로 진급했고, 국방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1986년 전방 GOP부대인 25사단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자신의 군 생활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시기를 묻는 질문에 연대장 시절이라고 말했다. 지휘관으로써 조직을 이끄는 완벽한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장병들과 함께 뒹굴었다. 당시 그와 함께 근무했던 운전병과 하사관들이 지금도 찾아올 정도다. 덕장(德將)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지휘관이 아무리 잘해도 병사 한명이 잘못되면 안 된다. 모든 분야를 합리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대 장병 3000명 모두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했다. 장병 한명 한명이 일상적인 임무에다가 인원, 장비, 시설, 경계 등의 한 가지 특별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체크하고 관리했다. 그러면 부대원 모두를 관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사단장, 사령관 등으로 군을 지휘하면서 그대로 적용했다.


그는 “혼자서는 안 된다. 조직의 힘을 빌어서 같이 하면 잘 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장기를 찾고 임무를 주고, 통합하는 것이다”며 “조직을 관리할 때 혼자서 하지 말고 전 조직을 활용하고 조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락 없는 1차 진급


전방부대 연대장을 마친 그는 합동참모본부 작전과장을 거쳐 1990년 육군 준장으로 별을 달았다. 31사단 부사단장, 합참 작전차장 등을 거쳐 1993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50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제주 출신 첫 사단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후방부대 사단장의 급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왜 후방으로 가느냐는 말들이 많았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사단장 14개월 만에 국방부의 핵심인 정책기획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96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해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1999년에는 4성 장군에 이름을 올리며 육군 대장으로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소위에서 대장까지 단 한 차례도 진급에서 누락된 적이 없다. 제주 출신으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당연히 주변에서 시기도 많았다. 제주도 촌놈이 1차에서 진급을 계속하다보니 ‘하나회’의 아류로 몰리기도 했고, 운이 좋은 것이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그는 “운이 좋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라며 “자기가 맡은 업무에서 최고가 돼야 한다. 저 사람이 진급되지 않으면 불공평하다는 여론이 나올 정도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2군 사령관(사진 앞줄 왼쪽서 다섯 번째) 재직 당시 모습.

▲대한민국 군사, 외교 안보를 이끌다


육군 소장과 중장 당시 국방부의 핵심인 정책기획관과 정책보좌관으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군사와 외교 안보의 키포인트 역할이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의 외교 안보를 다뤘다. 정책기획관에 부임한 이후 3개월 만에 한미일 국방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상대자는 세계 최고 전문가인 프랭클린 크레이머 미국방부 국제안보차관보와 사토 켄 일본 방위청 방위국장이었다.


그는 “솔직히 처음에는 내용을 잘 몰랐지만 대한민국 국방의 실무 책임자인데 논리적으로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휘관 할 때부터의 원칙인 조직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당시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12시에 퇴근할 정도로 바쁜 생활을 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 장교들에게 안보 관련 책을 읽게 하고 요약해 서로 토론했다. 한달에 수십권의 책을 읽는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2년을 했으니 그가 섭렵한 안보 관련 서적은 수백권에 달했다. 작전통·전략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개월 후 크레이머 차관보를 다시 만났다. 그는 “크레이머 차관보가 내가 제주도 출신인걸 알고 있었다”며 “ ‘처음 왔을 때는 그러더니, 6개월만에 완전히 달라졌다. 한수 배우겠다’고 하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1999년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에 나서 한국이 부담하는 방위비를 1995년 수준으로 경감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방위비분담금이 경감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30년 앞을 내다본 한국의 국방정책을 수립했다. 그리고 직접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의 국방정책은 ‘국방개혁안 2020’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을 경호하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후보로 항상 이름을 올렸었다. 하지만 2001년 예편하고 군복을 벗었다.


예비역 장성과 대령급 인사들의 모임인 서초국방포럼을 이끌던 그에게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찾아 왔다. 2006년 9월쯤이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당시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작전통제권 반환 문제 등에 대해 물었고, 답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돕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게 인연이 된 것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 과정에서 국방정책에 대해 조언했고 국방정책자문단을 이끌며 예비역장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과 함께 국방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대통령 경호처장으로 2008년 2월 청와대에 입성했다. 대통령경호처가 장관급인 경호실장에서 차관급으로 격하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 경호 업무는 대통령께 신뢰를 주지 못하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책임지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가 없다. 경호는 무슨 말이 필요하지 않고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경호처장 시절 청와대를 찾은 고향 인사들을 항상 따뜻하게 맞았고 2008년 제주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경호를 위해 제주도와 협약을 맺어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지원했다. 그는 2011년 10월까지 3년8개월 동안 대통령을 지켰다.

 

▲혼자서는 안된다


38년 군 생활에 대해 “나에게 주어진 소명, 군인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다. 후회스러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개인 생활은 거의 없었다”며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부인 고경자씨(68)와 2남을 두고 있다.


그는 꼭 후배들에게 전해 줄 말이 있다고 했다.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 될 수가 없다. 더불어 같이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제주도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도지사도 65만 도민의 말을 들어야 한다. 도민들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 혼자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국민 모두의 생각이 중요하고 그걸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공무원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며 공직사회의 분발을 당부했다.


고향 제주에 대해 “나는 제주도의 덕만 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보다 훌륭한 군인들이 많다. 하사관 등으로 40년 넘게 군에 충실한 사람들이 진짜 훌륭한 군인이다. 그런 분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