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가난한 개척민 아들에서 해병대 수장 오르다
(28) 가난한 개척민 아들에서 해병대 수장 오르다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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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해병지휘참모대학 수료…제주 최초의 해병대 사령관
"아름다운 제주, 자연 보전해 지속발전한 방향 찾아야"

해병대의 첫 모집병은 제주 출신이 100%였다. 1950년 8월 5일 입대한 해병 3기(1661명)는 교사와 청년이 주축이었고, 8월 30일 입영한 4기(1277명)는 대다수가 학생이었다.

그래서 해병대의 근간은 제주에서 시작됐다. 2938명의 해병 3·4기는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등 모든 공세에 앞장섰다.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6·25전쟁에서 숱한 승전보를 올렸다.

도솔산전투에선 무적해병의 신화를 만들어낸 전설의 기수가 됐다.

강인한 제주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김인식 전 해병대 사령관(68)은 해병의 전통과 위상을 끌어 올린 인물이다.

▲ 2003년 해병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김인식 중장을 축하하기 위해 신철주 군수와 한림공고 동문들이 포항 사령부를 방문한 모습.

▲개척농가에서 자라다=그는 1948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횡성에서 작은 여관을 운영했다. 가족은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횡성성당(현 풍수원성당)에는 아일랜드 출신 신부가 있었다. 한림성당 신부를 역임한 맥그린치와 사제 서품을 함께 받은 동기였다.

“횡성에 있는 아일랜드 신부님이 한림에서 이시돌목장을 새롭게 개척했다며 큰형(김명식)에게 제주에서의 새 삶을 권유했죠. 큰형이 1961년 먼저 한림 금악리 개척농가에 입주해 터전을 잡았죠. 3년 뒤인 1964년 저를 포함에 모든 가족이 제주도로 이사를 가죠. 제 본적이 금악리로 된 이유죠.”

자라온 곳이 제주여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제주 출신’이라고 강조해왔다.

16살에 제주에 온 그는 돼지를 키우고 고구마를 재배하는 일을 도왔다.

1960년대 초반 이시돌 개척농가에는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물은 금악오름 밑에 있는 저수지에서 길러다 썼다.

“황량한 들판을 개척한 미국 서부시대의 생활로 보면 되죠. 제주에서 개척민의 자식으로 살았던 게 보람을 느낍니다.”

제주에 정착한 이듬해인 1965년 그는 한림공고(14회) 기계과에 입학했다.

이시돌목장에서 학교까지 무려 8㎞를 걸어서 다녔다. 너무 먼 거리를 통학하는 것을 안쓰럽게 여긴 담임교사는 그를 한림읍 시내에 있는 한 가정에 입주 가정교사로 보내줬다.

초·중학생을 가르치며 한림공고를 졸업했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교시절 내내 장학생이었다.

“제가 존경하는 큰형님은 대학을 나온 분이셨죠. 어려운 형편에도 제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죠. 국가에서 학비를 주는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는데 합격했죠. 1968년 해사에는 150명이 입학했는데 제주에선 저를 포함해 오현고 1명, 제주일고 1명 등 3명이 들어갔죠. 당시 실업학교에서 해사에 간 것은 제가 처음이었죠.”

▲ 2004년 이라크에 파병된 해병대원을 격려하는 김인식 사령관.

▲해병대에 들어가다=1968년 그가 해사에 입학한 후 이틀만인 1월 12일 ‘1·21사태’가 터졌다.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붙잡혔다. 그해 11월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해사에 입교한 순간부터 빡센 훈련을 받아야 했다.

“애국심과 국가관이 투철할 때였죠. 그 당시 사관생도에게 가장 영예스러운 일은 전장터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해서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었죠. 지금은 시대와 세대가 변했지만 그 때는 그랬죠.”

그는 축구·농구·배구·야구 등 공을 갖고 하는 경기는 뭐든지 잘했다. 해사에선 조정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생도 4명이 생활하던 기숙사에는 신학교에 갔다가 해사로 온 동기가 있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려던 그는 형이 월남전에서 전사하면서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해사로 진학한 것이다.

“해병을 지원하려는 동기의 영향으로 저도 해병이 돼서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했죠. 국가에 헌신하는 일은 그 길이라 생각했죠. 아쉽게도 임관을 한 1972년 월남전이 끝나 참전은 하진 못했죠.”

해병 소위로 임관한 그는 포항에 있는 해병 1사단에서 복무했다. 그의 밑에 있던 부사관은 100%, 사병의 70%는 월남전 참전용사였다.

복무기간을 채우기 위해 1사단에 재배치된 것이다. 그는 젊은 소대장이었지만 월남전 용사들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 2003년 김인식 사령관이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한 마이클 해지 미해병대 사령관(오른쪽)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해병대 수장에 오르다=강도 높은 상륙훈련과 공습훈련을 마친 그는 중령이던 1985년 미국에 파견돼 1년간 미해병지휘참모대학 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에는 6여단 대대장으로 백령도에서 근무했다.

강화도와 김포, 백령도 등 군 생활 대부분을 최전방에서 보낸 그는 1998년 별을 달고 6여단장으로 부임했다.

6여단장은 눈앞에 북한과 마주한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서북 5개 도서를 책임지는 자리다. 북의 도발과 위협은 끊이질 않았다.

“서북 5개 도서는 평상시에도 준전시 상황이고, 유사시에는 바로 전투를 치러야 했죠. 대치 상황인 만큼 항상 긴장을 해야 했죠. 북한군이 귀순을 하는 과정에서 구출작전도 수행했죠.”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진급 때마다 선두에 섰다. 별 하나였던 6여단장 부임 1년 만에 별 둘을 달고 2사단장에 올랐다.

이어 해병대 부사령관, 해군참모총장 해병보좌관, 합참 전비태세 검열실장에 이어 2003년 별 셋을 달고 제26대 해병대 사령관이 됐다.

제주 출신 중 처음으로 해병대 수장이 됐다. 제주 출신 해병 3·4기가 입대한 이래 53년만의 경사였다.

“사령관이 되자 모교인 한림공고에 가서 강연을 했죠. ‘가난한 제주의 개척민이 아들이었지만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말했죠.”

그는 사령관이던 2004년 이라크의 평화 유지와 재건 임무를 위해 파병된 자이툰 사령부와 부대원을 지키기 위해 해병대 1개 중대를 파병했다.

2010년 북한이 서해 연평도에 170여 발의 포격을 가해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한 것을 두고 그는 북에 말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