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첫 모집병은 제주 출신이 100%였다. 1950년 8월 5일 입대한 해병 3기(1661명)는 교사와 청년이 주축이었고, 8월 30일 입영한 4기(1277명)는 대다수가 학생이었다.

그래서 해병대의 근간은 제주에서 시작됐다. 2938명의 해병 3·4기는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등 모든 공세에 앞장섰다.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6·25전쟁에서 숱한 승전보를 올렸다.

도솔산전투에선 무적해병의 신화를 만들어낸 전설의 기수가 됐다.

강인한 제주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김인식 전 해병대 사령관(68)은 해병의 전통과 위상을 끌어 올린 인물이다.

   
▲ 2003년 해병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김인식 중장을 축하하기 위해 신철주 군수와 한림공고 동문들이 포항 사령부를 방문한 모습.

▲개척농가에서 자라다=그는 1948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횡성에서 작은 여관을 운영했다. 가족은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횡성성당(현 풍수원성당)에는 아일랜드 출신 신부가 있었다. 한림성당 신부를 역임한 맥그린치와 사제 서품을 함께 받은 동기였다.

“횡성에 있는 아일랜드 신부님이 한림에서 이시돌목장을 새롭게 개척했다며 큰형(김명식)에게 제주에서의 새 삶을 권유했죠. 큰형이 1961년 먼저 한림 금악리 개척농가에 입주해 터전을 잡았죠. 3년 뒤인 1964년 저를 포함에 모든 가족이 제주도로 이사를 가죠. 제 본적이 금악리로 된 이유죠.”

자라온 곳이 제주여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제주 출신’이라고 강조해왔다.

16살에 제주에 온 그는 돼지를 키우고 고구마를 재배하는 일을 도왔다.

1960년대 초반 이시돌 개척농가에는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물은 금악오름 밑에 있는 저수지에서 길러다 썼다.

“황량한 들판을 개척한 미국 서부시대의 생활로 보면 되죠. 제주에서 개척민의 자식으로 살았던 게 보람을 느낍니다.”

제주에 정착한 이듬해인 1965년 그는 한림공고(14회) 기계과에 입학했다.

이시돌목장에서 학교까지 무려 8㎞를 걸어서 다녔다. 너무 먼 거리를 통학하는 것을 안쓰럽게 여긴 담임교사는 그를 한림읍 시내에 있는 한 가정에 입주 가정교사로 보내줬다.

초·중학생을 가르치며 한림공고를 졸업했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교시절 내내 장학생이었다.

“제가 존경하는 큰형님은 대학을 나온 분이셨죠. 어려운 형편에도 제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죠. 국가에서 학비를 주는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는데 합격했죠. 1968년 해사에는 150명이 입학했는데 제주에선 저를 포함해 오현고 1명, 제주일고 1명 등 3명이 들어갔죠. 당시 실업학교에서 해사에 간 것은 제가 처음이었죠.”

   
▲ 2004년 이라크에 파병된 해병대원을 격려하는 김인식 사령관.

▲해병대에 들어가다=1968년 그가 해사에 입학한 후 이틀만인 1월 12일 ‘1·21사태’가 터졌다.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붙잡혔다. 그해 11월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해사에 입교한 순간부터 빡센 훈련을 받아야 했다.

“애국심과 국가관이 투철할 때였죠. 그 당시 사관생도에게 가장 영예스러운 일은 전장터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해서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었죠. 지금은 시대와 세대가 변했지만 그 때는 그랬죠.”

그는 축구·농구·배구·야구 등 공을 갖고 하는 경기는 뭐든지 잘했다. 해사에선 조정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생도 4명이 생활하던 기숙사에는 신학교에 갔다가 해사로 온 동기가 있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려던 그는 형이 월남전에서 전사하면서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해사로 진학한 것이다.

“해병을 지원하려는 동기의 영향으로 저도 해병이 돼서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했죠. 국가에 헌신하는 일은 그 길이라 생각했죠. 아쉽게도 임관을 한 1972년 월남전이 끝나 참전은 하진 못했죠.”

해병 소위로 임관한 그는 포항에 있는 해병 1사단에서 복무했다. 그의 밑에 있던 부사관은 100%, 사병의 70%는 월남전 참전용사였다.

복무기간을 채우기 위해 1사단에 재배치된 것이다. 그는 젊은 소대장이었지만 월남전 용사들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 2003년 김인식 사령관이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한 마이클 해지 미해병대 사령관(오른쪽)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해병대 수장에 오르다=강도 높은 상륙훈련과 공습훈련을 마친 그는 중령이던 1985년 미국에 파견돼 1년간 미해병지휘참모대학 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에는 6여단 대대장으로 백령도에서 근무했다.

강화도와 김포, 백령도 등 군 생활 대부분을 최전방에서 보낸 그는 1998년 별을 달고 6여단장으로 부임했다.

6여단장은 눈앞에 북한과 마주한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서북 5개 도서를 책임지는 자리다. 북의 도발과 위협은 끊이질 않았다.

“서북 5개 도서는 평상시에도 준전시 상황이고, 유사시에는 바로 전투를 치러야 했죠. 대치 상황인 만큼 항상 긴장을 해야 했죠. 북한군이 귀순을 하는 과정에서 구출작전도 수행했죠.”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진급 때마다 선두에 섰다. 별 하나였던 6여단장 부임 1년 만에 별 둘을 달고 2사단장에 올랐다.

이어 해병대 부사령관, 해군참모총장 해병보좌관, 합참 전비태세 검열실장에 이어 2003년 별 셋을 달고 제26대 해병대 사령관이 됐다.

제주 출신 중 처음으로 해병대 수장이 됐다. 제주 출신 해병 3·4기가 입대한 이래 53년만의 경사였다.

“사령관이 되자 모교인 한림공고에 가서 강연을 했죠. ‘가난한 제주의 개척민이 아들이었지만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말했죠.”

그는 사령관이던 2004년 이라크의 평화 유지와 재건 임무를 위해 파병된 자이툰 사령부와 부대원을 지키기 위해 해병대 1개 중대를 파병했다.

2010년 북한이 서해 연평도에 170여 발의 포격을 가해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한 것을 두고 그는 북에 말로만 재발 방지를 요구하면 도발은 계속할 것이라며 대비 태세를 굳건히 하되 강한 응징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군은 해병대를 싫어하죠. 그만큼 무서워한다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 해병대처럼 짧은 기간에 최강의 군대로 키워낸 사례는 없었죠. 싸워서 질 것 같으면 적은 전쟁을 걸지 않습니다. 3만 정예 병력으로 똘똘 뭉친 해병대는 적의 도발을 억제하고 응징하는 강한 전투력으로 무장돼 있습니다.”

   
▲ 2003년 해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김인식 중장의 삼정도에 수치를 걸어 준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

▲해병대전우회 총재에 오르다=2005년 군문을 나선 그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해병대전우회 총재를 역임했다.

해병대전우회는 미국·독일·영국·캐나다·호주·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세계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다.

이들의 끈끈한 인맥과 응집력으로 인해 해병대전우회와 호남향우회, 고려대교우회를 두고 ‘대한민국 3대 마피아’라 불리고 있다.

그는 총재를 역임하며 80만 예비역 해병의 명예와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국방부는 교통정리와 대민 지원 등 봉사활동에 한해 전역한 해병에게 유사군복 착용을 허용해 주고 있죠. 빨간명찰을 달고 팔각모를 써야만 봉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요구를 받아들인 거죠. 말 그대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죠.”

그는 이어 “1992년 미국 LA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2800여 곳의 한인 업소가 약탈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죠. LA해병전우회 회원들이 총탄이 날라 다니는 현장에서 한인 업소를 지켜준 덕분에 코리아타운이 안정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제주의 미래에 대해=그는 개척민의 아들로서 고향 제주가 더욱 발전되기를 기원했다.

“개척민의 후손인 조카들은 지금도 한림에 살고 있죠. 내가 젊음을 보낸 이시돌목장이 있던 금악리를 갔더니 많이 발전해 있었죠. 아쉽게도 제주에서만 근무를 못해봤죠. 그래서 1년에 3번은 고향 제주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입니다. 이율배반적일지는 모르지만 자연을 잘 보전하면서 지속 발전한 방향을 찾아야 하죠.”

그는 “섬이라는 지형·공간적 특성 상 인구 100만명은 있어야 성장 동력을 얻을 수 있다”며 “민·관·군이 협력하고 상생을 하면 고향 제주가 더욱 클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