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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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수필자

어젯밤에 머리염색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해줘야 그나마 흰머리가 감춰지는데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정수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낮에 만난 그 아이에게 할머니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시간에 이러고 있을까…. 혼자서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넘긴다.


손자를 넷이나 둔 할머니임에도 밖에서 처음 들은 할머니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손자들이 부르는 할머니는 마냥 좋기만 했는데 누가 부르냐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스스로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봄 서울로 연수여행을 갔을 때였다. 신사동에 위치한 숙소에 짐을 풀고, 온종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해서였는지 커피 향이 그리워 밖으로 나왔다. 도시의 밤은 지나치는 자동차 불빛과 빌딩 숲에서 내리쬐는 조명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커피숍을 찾으며 한 오 분쯤 걸었을까. 눈에 띄는 건 성형외과 간판뿐이었다. 이백여 개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그 간판들의 틈새에 끼어있는 조그만 커피숍이 반가웠다.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나이를 먹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함께 한 지인과 쓸쓸히 웃었던 기억이 스친다.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앉는다. 집에만 있을 때는 하루가 다 가도록 거울 한 번 보지 않고 지내기도 하지만, 밖에서 할 일이 생기면서부터 아침마다 겨울 앞에 앉아 얼굴을 다듬는다. 피부 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다. 내가 만날 누군가에게 보일 나의 얼굴에 투자하는 시간은 오 분 남짓. 분을 바르고 색을 입힌다고 주름지고 늘어진 얼굴이 환골탈태야 하랴마는 오늘 만나게 될 누군가를 위해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거울을 보기 전에는 내 얼굴은 내가 바라볼 수 없다. 평생을 내가 달고 다니는 얼굴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의 일이다. “왜 화났어?” 갑자기 던지는 지인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묵묵히 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물음에 당황했다. 나에 대한 관심이라고 좋게 받아들이긴 하면서도, 그 순간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얼굴이 화난 표정으로 보였다는 게 신경 쓰였다. 나도 누군가에게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이런 질문을 던졌었는지 되짚어본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방의 표정만 보고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판정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게다.


내 얼굴도 보지 못하면서 남의 얼굴을 살피다니…. 하지만 사람과의 교감이 이런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건 아닐까. 타인의 얼굴이나 몸짓에 나타난 감정을 읽는 그 순간부터 상대방과의 공감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머릿속에서 거울처럼 반영되는 상대에 대한 경험, 욕망, 감정, 그리고 그 보상으로 상대도 나를 거울처럼 비춰주기를 바라는 마음 상태를 거울뉴런이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이해하는 만큼 이해받기를 바라고, 공감하는 만큼 공감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내 머리 속 거울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늘 함께 하는 가족들이 닮은꼴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기 때문일 것이다.


유심히 나를 들여다본다.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둥글고 평범한 얼굴이 지켜보고 있다. 바람에게 길을 내주며 비어가는 머리카락에 세월의 지문으로 새겨지는 잡티들 하며 내가 다 보지 못하는 내 인생의 한 면을 보여주며 서서히 늙어가고 있다. 거울 저편에서 가끔 생기 넘치던 시절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하지만 그도 오래지 않아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겠지. 조금씩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흘러가는 구름이 강물에 비치듯 저물어가는 노을이 바다를 적시듯 거울 앞에 앉아있는 이 순간도 잠시 머무르고 사라져 갈 것을….  


나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대상을 생각해본다. 가족과 친족, 사회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바다와 산과 숲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 그리고 나의 글쓰기. 거울 앞에 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보듯 백지 안에 나를 쏟아놓는 글쓰기는 때때로 비밀스런 치부를 드러내야만 하는 고통이 따른다. 고요히 두 눈을 감고 영혼의 불을 밝혀 마음속 깊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진정한 나를 만나야 한다. 그렇게 내 인생 후반을 비춰 줄 진정한 거울 하나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겨울 햇살이 따사로운 아침, 거울 속에서 한 여자가 웃고 있다.

 

백나용기자 nayo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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