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찬노숙(風餐露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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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230만 민중이 켜든 촛불은 장엄했다, 온 나라가 분노로 일어선 격랑의 바다, 들불 타오르고 회오리 휩쓰는 들판이었다.


살 에는 겨울밤에도 촛불은 얼지 않았다. 시민혁명으로 가는 길, 촛불은 꺼지지 않고 번져 분노를 재울 시점까지 갈 것이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현직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뗐다.


헌법재판소의 인용이 남았지만, 직무가 정지되면서 대통령이 추락했다.


여러 정황에서 탄핵안이 기각될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 사(史)의 비극이다.


국정농단 사태와 이후 탄핵안 가결로 치달려 온 일련의 흐름을 지켜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리가 왜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하는 회한, 그 속에는 대통령을 잘못 뽑은 자책도 엄존했다.


그냥 대통령이 된 게 아니었다.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후광에 시대의 혼미 속 조상부모(早喪父母)한 연민의 정인들 왜 없었나.


우리는 18년을 잊고 있었다. 아버지 대통령 시절에서 시작한 청와대의 삶에서 어머니 시해 이후 영부인 대리, 또 정치에 입문해 오늘에 이른 대통령의 그 18년. 오랜 시간을 구중궁궐에 살았다. 누구 말마따나 공주였다.


궁궐의 담장은 성채(城砦)같이 높다. 그곳에선 세상이 안 보인다.


직접 겪고 부대끼지 않으면 세상을 모른다.


세상을 사는 무수한 보통사람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애환을 짚어 낼 수 없다.


우리는 선거에서 중요한 그것을 놓쳤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깍지 씌어 안 보였던 것이다.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서 먹고 잔다는 뜻으로, 모진 고생을 이르는 말이다. 바람과 이슬 속에서 모질이 자란 나무가 고운 꽃을 피운다.


대통령이 민생을 챙긴다고 시장을 돌며 떡볶이를 사먹는 것으로는 안된다. 그것은 진정이 아닌, 한낱 보여 주기 위한 연기일 뿐이다.


가면무도회 같은 손 흔들기와 웃음이 모두 자신과 자신이 소속한 정치 집단의 입지를 강고히 하려는 제스처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 왕도 여염(閭閻)을 살피려면, 미복(微服) 행색으로 혼자 대궐을 빠져나왔다.


재벌을 불러 앉힌 국정조사 청문회를 보고 있자니 딱하고 불편했다. 위장된 얼굴, 속과 겉이 다른 말과 순간순간의 표정관리. 우월감이 흡사 제후들로 보였다.


전혀 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정경유착을 힐난한들 말 한 톨 귀에 넣겠는가.


한 맥락에서, 언필칭 민생을 들먹이지만, 서민의 삶을 모르는 대통령이 민생을 챙기는 것은 어불성설로 실소(失笑)할 일이다.


한때 여성대통령을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섣부른 선택이었다.


브라질의 여성대통령 지우마 호세프가 탄핵됐다.


경제난 악화로 민심이 폭발했다 한다. 실업자가 1200만이라니 먹고사니즘(먹고 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가치관에서 나온 신조어)에 매몰될 수밖에.


한데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 메르켈은 2005년 이래 9년을 현직에 있다. 그는 말한다.


“권력은 하나의 수단일 뿐, 목표는 아니다. 빨리 가자고 하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고자 하면 함께 가라.”


한참 다르다. 우리 대통령은 맹목(盲目)이었다.


앞으로 사람을 잘 세워야 한다. 풍찬노숙, 들판에서 모질게 살아온 이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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