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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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

시계는 지금도 가고 있다.


대통령의 선물이라 그런지 분신처럼 애지중지 아끼던 시계다. 호스피스 병실에서도 누군가를 만날 약속 시간을 확인하듯 시계를 보곤 하셨다. 뼈만 남은 손목에 시계가 무거웠던지 머리맡에 풀어 놓으셨다. 육신을 벗은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책상 위에 있는 시계는 멈출 줄 모른다. 더구나 오늘 같은 적막한 밤에 시계를 마주하면 초침은 아버지의 맥박 소리로 다가와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크로노스(chronos)의 흐름 속에 삶을 시작한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되는 하루 24시간, 1440분, 8만6400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돈으로 살 수 없고, 빌려 쓸 수도, 저축할 수도 없으며, 붙잡고 매달려도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크로노스란 연료를 태우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간이역을 지나다, 연료가 다하는 순간 내려야 하는 기차여행이 아닐까.


시계 바늘을 잡고 돌고 도는 크로노스의 일상을 넘어, 개인에게 주어지는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마음먹기에 달라지는 시간, 가치를 창조하고 선한 일을 하는 시간이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인생의 기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하나님의 신비와 조우하는 영적 시간이다.


고희(古稀)의 초입에 들어서니,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 고백한 먼 옛날 모세의 한 마디가 마음에 공명을 울린다.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았느냐?”


흘러간 시간 속에서 최상선(最上善)을 향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성찰하며,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람과 부족함투성이 뿐. 성적표를 숨기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이 된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판을 더듬고 있는 새벽, 아버지의 시계는 변함없이 “째깍째깍” 찰나(刹那)를 넘긴다. 문뜩 그 소리에 김재진님의 시가 떠올랐다.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중략)/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잠들기 전에 남아 있는 시간이, 가야할 길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순간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영혼의 텃밭에 사랑의 겨자씨를 심어 키우고 싶다.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암으로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위지안(于娟) 교수의 한 마디가 마음을 재촉한다. 지금 여기서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사랑의 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어루만지며, 사랑의 혀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하여 인생의 성적표의 빈칸에 한 점의 빛을 밝히다 생을 마감하는 ‘반딧불이처럼 살았다’고 기록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인생은 초록 연(蓮) 잎에 맺힌 아침 이슬방울. 일출(日出)의 장엄함도 일몰(日沒)의 아름다움도 한 순간 지나가는 것. 지금 여기서부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영원에 합당한 카이로스의 삶을 일구어가라.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시계적 시간을 넘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을 누리고 계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 순각(瞬刻)도 아버지의 시계는 영원을 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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