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제주시 도심 전경. 가운데 하얀색 건축물들은 제주목 관아가 철거된 자리로 시청과 법원, 경찰서가 들어섰다.

제주성내 옛길은 제주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자 역사적 가치와 정취가 살아 있는 숨 쉬는 길이었다.

길의 제주방언은 ‘질’이다. 또 동네를 뜻하는 ‘골’ 또는 ‘굴’이 붙여져서 옛길 이름이 됐다.

가령 동문으로 가는 넓은 길목이라는 의미로 ‘동문한질’, 남문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이라서 ‘남문샛길’, 화재로 인한 불길을 막는다는 뜻으로 동쪽의 화마를 막는 ‘동불막골’, 서쪽의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 ‘서불막골’로 불려졌다.

이처럼 넓거나 좁은 옛길은 상호 연결된 유기적인 기능과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옛길은 54곳이 있었다. 이 중 50곳(93%)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나머지 3곳은 일부 구간만 잔존해 있고, 1곳은 사라졌다.

옛길 가운데 74%는 오늘날도 대부분 도심의 골목길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옛길은 다음과 같다.

▲객사골=제주북초등학교와 옛 전매청 사이의 골목길이다. 이 길의 동쪽 마을이 객사골이다. 제주북초에 있었던 영주관이라는 객사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이다.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지방에 있었던 최상위 건축물이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예를 올렸다.

객사 부속건물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돼 객관(客館)이라고 불렸다.

제주목의 객사는 제주의 또 다른 이름인 영주(瀛州·신선이 사는 곳)를 차용해 영주관(瀛州館)이라 불렸다.

▲창신골=객사골을 동서로 잇는 길이며, 가죽제품과 가죽신을 다루는 공방이 들어서 있었다. 가죽신을 만드는 천민인 갖바치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해서 ‘창신골’이라 불렸다.

일제시대 땅값이 싸고 산지항과 가까워서 일본인 집단 주거 지역이 됐으며 이후 ‘창신동’이라 명명됐다.

제주에선 새 동네가 들어서면 ‘신설동(新設洞)’이라 불려왔다. 도내에는 모두 4곳의 신설동 마을이 있다.

 

   
▲ 제주성내 옛길 이름.

▲옥길=북성 안에 감옥(獄)이 있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중앙지구대에서 탑사우나로 가는 관덕로 9길에 해당된다.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1653년)는 ‘옥(獄)은 9칸의 건물로 담장을 높이 두르고 문은 하나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1704년)에는 ‘형옥은 21칸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시대 별로 감옥의 규모가 달랐다.

한말인 1897년 유배를 온 김윤식은 감옥에 대해 ‘육중한 나무문과 쇠사슬에 통쇠로 채우고 주위에 가시덤불을 쌓았다’고 기록했다.

▲칠성골=칠성골은 산지목골에서 관덕정 광장까지의 길로 조선시대 중심 도로였다.

그래서 일제시대 상가는 읍성 중심부인 칠성통(본정통·本町通)과 관덕로(원정통·元町通), 남문 한짓골, 서문한질 일대에 자리 잡았다. 

옛 제주인들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숭배했다.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이 각각 일도, 이도, 삼도로 나누어 차지한 후, 북두칠성 모양을 본 떠 대(臺)를 쌓아 마을을 이뤘다.

칠성대는 제주성안 7곳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흩어져 있었다. 7곳의 칠성대 중 3곳이 있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칠성골이라 불리게 됐다.

▲생짓골=향교가 있던 마을은 예로부터 ‘생짓골’이라 불려왔다. 향교를 뜻하는 ‘생짓’은 사투리의 변화형이다. 일제시대 측량 당시 이도리 1349번지 전체는 향교터였다. 현재의 오현로 일대다.

향교의 윗동네는 웃생짓골이라 했다. 이 마을에는 세력이 있는 집안이나 유림 등 양반들이 살았다.

거상이자 근대 기업가인 박종실를 비롯해 김응빈 판관, 김근시 참사 등 세도가들이 이 동네에 살았다.

▲영뒷골=관덕정의 서쪽과 북쪽으로 난 좁은 길이다. 영리청(營吏廳)의 뒷길이란 뜻으로 ‘영뒷골’이 됐다.

영리청 또는 영청은 군사업무를 수행하는 곳이다. 목사가 군사령관을 겸직하면서 집무실을 ‘영청(營廳)’이라 불렀다.

영리청의 공식명은 ‘홍화각’이었다.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의미다. 홍화각은 1435년(세종 17) 최해산 목사가 창건했다.

 

   
▲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옛길인 ‘몰항골’에 초가집이 남아있는 모습.

▲탑알길=예로부터 탑을 쌓았던 곳이라 해서 탑알이라고 불렸다. 후에 한자 표기에 따라 ‘탑동(塔洞)’이 됐다.

무근성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인가는 없고 대부분 밭이었다.

탑을 쌓은 아래 마을이라는 뜻에서 ‘탑알’, ‘탑바리’라 불렀으며, 오늘날 북성로에서 오리엔탈호텔로 내려가는 무근성길에 해당된다.

▲성굽길=성터의 해자가 남아 있는 인근의 마을을 ‘성굽’이라 했다. 남문 성터가 남아 있는 자리다.

원래 서문사거리에서 탑동 해안변까지 이르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제주성 옛길을 통틀어 ‘성굽길’이라 불리고 있다.

지난 2월 원희룡 지사가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성굽길을 답사했다. 재생사업은 성굽길(3.2㎞)을 재현하고, 토지 61필지(1만2353㎡)와 건물 50동을 매입해 관덕정 광장 조성, 서문 및 공신정 복원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의회는 총사업비 297억7000만원을 투입되는 이번 사업에 대해 전체적인 도시재생 활성화계획이 수립되지 않았고, 주민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최근 부지 취득 동의안에 대해 심사를 보류했다.

한편 제주성내 옛길 중 동문시장과 제주삼성안과의원 일대 골목길인 ‘웃막은골’은 제주은행 본점이 들어서면서 길이 막혀버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