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그냥 감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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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겸 <제2회 수필작품 공모전 ‘장원’ 수상작>

집을 떠나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보고 싶어졌다. 큰 맘 먹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여름방학동안 같이 지냈는데도 떠나자마자 그리워지기 시작하니 이것도 병인가 싶다. 스무 살이 되면 철저히 세상 밖으로 보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독립시키겠다던 내 의지와는 달리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걱정이 되고 만다. 아들이 좋아할만한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챙기다보니 여행 가방이 묵직해진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으리라.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일방통행로 같은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들은 헤아릴 수는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자식바라기는 탯줄을 자르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고, 자식은 어머니를 지탱하는 세상의 이정표가 아닌가.

 

콩이 여물면 어머니는 콩깍지처럼 거칠어진 손으로 일일이 콩 껍질을 깐다. 콩을 고르고, 불편한 다리로 먹음직스러운 오이나 가지, 고추를 따서 냉장고에 들여놓는다. 이 모든 수고로움은 어머니에게 달콤한 위안을 가져온다. 자식들 입으로 들어가는 상상만으로 이미 행복해지므로.

 

한때는 육남매가 시끌벅적거리고 비좁게만 느껴졌을 그 곳에, 지금은 어머니만 홀로 지내신다. 덩그렁 빈 집에는 그리움 같은 정적만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 다니고 있다.

 

“아이고, 내가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눈물 보이멍 해신디, 두고두고 마음에 걸렴쪄. 그 때 일은 잊어버리라.”

 

그날 마음속에 맺힌 서운함을 툇마루 한복판에 보자기 펼쳐보이듯 풀어 놓으시고, 마음 약한 어머니께서는 자식들 마음 아플까봐 혼자서 가슴을 치며 불면의 밤을 보냈나 보다.

 

“우리는 벌써 다 잊어수다. 어머니도 그냥 잊어버리십써.”이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맥없이 공허하게 공간으로 흩어져 사라질 뿐이었다.

 

그날은 벌초가 있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내에 살고 있는 온 식구들이 가족장에 모였다. 뙤약볕이 무차별적으로 온몸을 내리쬐는 무더위에 가족들은 자외선 차단제와 모자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남자어른들은 전사처럼 벌초기계를 어깨에 들쳐 메고 여름 내내 잔디사이로 커버린 억새와 고사리 같은 잡초들을 굉음과 함께 베어냈다. 여자 어른들은 기계로는 힘든 구석의 잡초와 돌담 주위에 칭칭 감은 억센 칡넝쿨을 낫으로 잘랐다. 민들레와 개망초 뿌리도 뽑아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해 벌초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베어진 풀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벌초기계소리에 놀라서 뛰어 오르는 메뚜기를 잡거나, 싱그러운 풀냄새를 맡으며 맘껏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나절 벌초를 끝내고 나니 온 몸은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듯이 그대로 쓰러질 판이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켜 보았지만 이번에도 가족 산에 가는 것은 생각으로 그쳐야 했다. 대신 식구들이 벌초가 끝나면 집에 들러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여름내 자란 잔디를 깎고 , 손자들이 한바탕 놀다가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벌초가 끝나고 저마다 바쁜 일이 있어서, 서둘러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가장 손 아래였던 우리 부부가 어머니에게 음식도 갖다 드리고 바쁜 형님네를 대신해서 조카도 집에 데려다주어야 했다. 벌초 후 밀려오는 피로에, 어머니 집에 들르는 것이 성가신 의무로 느껴졌다. ‘조카 핑계를 대면서 빨리 음식만 냉장고에 넣어 정리해놓고 인사만 하고 나와야지.’나는 조금이라도 집에 빨리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어내신 분이라 당신은 며느리에게 잘하리라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어머니는 나의 얕은 수가 한 눈에 보였던 것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 아들의 거짓말을 내가 본능적으로 알아채듯이 말이다. 역정 한번 내지 않던 어머니가 섭섭함을 눈물로 쏟으시고 말았다. 현관문 앞에서 신발도 벗지 않는 며느리와, 근처까지 와서도 얼굴한번 비추지 않는 자식들을 꾸짖고 있었다.

 

“무사 그냥 감시냐? 이리 들어 왔당 가라.”어머니는 겨우 몸을 일으켜 허허로운 팔짓으로 우리를 안으로 불러 앉혔다. 기다림에 지친 어머니의 눈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오늘은 아기들이랑 고기도 굽고 밥도 같이 먹고 놀다 갈 줄 알았쪄. 무사 그냥 감시냐? 그리고 다른 아들들은, 볼 일 보러 가는 길에 이 길도 안 지난덴 해냐? 잠깐 들르지도 못헌덴 해냐? 무사 그냥 감시냐?”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의 눈물에 차가운 냉수를 한바가지 얻어맞은 듯, 나는 당황했고 또 긴장해야만 했다. 축 늘어져있던 신경들이 갑자기 날카롭게 일어서고 나는 황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의 손을 잡아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약해지는 것인가. 온 몸으로 자식들의 바람을 막아주시던 어머니는 이제는 외로움조차 감출 힘도 없으셨나 보다.

 

가을하늘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솜털 구름이 떠있는 가을 하늘처럼 한없이 넓고 포근해서, 언제라도 어떤 잘못을 해도 품어줄 것 같은 어머니의 품. 그런데 이제는 낡은 창틀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리면서 흔들리며 울고 계셨던 것이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서.

 

어머니의 애틋한 기다림은 분꽃향기가 저녁노을 속으로 번져도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깊어진다. 아흔이 넘은 노모는 오늘도 창문에 매달려 자동차 소리가 날 때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 혹시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식에게 어머니의 그리움을 먹고 텃밭에서 자라난 채소들을 들려 보낼 꿈을 꾸신다.

 

‘무사그냥 감시냐? 들어 왔당 가라’ 하는 목소리가 가을바람을 타고 내 주위를 맴돈다. 우리 시어머니가 보낸 노란 호박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호박죽이라도 쑤어야겠다. 아들을 보러 서울에 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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