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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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논설실장
시인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이란 시가 있다. 오랜 기간 신문 밥을 먹으면서 그 시가 마음에 걸렸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신문 한 달 구독료가 1만원, 갈비탕 한 그릇 값이다.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든 공에 비하면 비싼 게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 내 글이 독자들의 가슴을 얼마나 따뜻하게 덮혀주고, 가려운 곳을 제대로 짚어 얼마나 시원하게 긁어주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부족하기만 하고 길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글을 쓴다는 것, 쉽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신문의 논평이나 칼럼 등은 현안과 이슈에 대한 깊이와 통찰을 요한다. 솔직히 일천한 능력과 식견으로 그걸 감당해내기가 녹록지 않았다. 정연한 논리와 대안 제시가 늘 고민이었다. 마감시간에 쫓겨 전전긍긍하는 꿈에 시달리기도 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변변한 기사를 밖으로 내놓고 마음을 졸였던 게 한 두번일까 싶다. 그래도 지인으로부터, 그리고 생면부지 독자로부터 “잘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산소 같은 위안을 얻었다. 그 한 마디가 간난의 세월을 이어준 동아줄이었다. 한편으론 그 말에 부담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아야 할텐데….”

▲7년 전 입적한 법정스님은 ‘말빚’을 자주 거론했다. 말로서 남에게 진 빚을 뜻한다. 대표작 ‘무소유’를 비롯해 마흔권이 넘는 스님의 수필집과 산문집은 향기롭고 깊은 울림을 준다. 어떻게 보면 말빚이 아니라 ‘말 빛’이라해야 옳다.

그럼에도 스님은 임종을 앞두고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풍진세상을 살면서 쏟아낸 말과 글이 세상을 어지럽힐까 저어한 것이리라.

▲연장선상에서 ‘글빚’을 생각한다. 그간 숱하게 풀어놓은 글과 기사들이 사실 또는 본질과 동떨어져 본의 아니게 당사자들에게 상처가 되었을 수 있다. 글빚이란 단순히 풀어놓은 기사로서 폐를 끼친 것뿐만이 아니다. 정작 써야 할 것을 쓰지 않고 외면한 것, 그게 언론의 역할에서 볼 때 더 중한 글빚이다.

신문기자로서 26년 넘게, 그 중에 8년 가까이를 본보(本報) 사설ㆍ칼럼을 담당했다. 오늘 이 글을 끝으로 펜을 내려놓는다. 많은 글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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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아 2021-08-22 01:56:45
글빚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참 좋은 기사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