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정치가 시작되는 한 해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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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지속가능한사회연구소장 /논설위원

지난 9월 9일 뉴욕대에서 “제주4·3과 미국”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겪었던 일이다. 국제연합본부를 출입한다는 미국 언론인이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당시 수만 명이 제주도민들이 죽었다는데 어떻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침묵 속에 갇혀 있을 수 있었는가?” 40~5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수많은 제주도민들의 죽음에 관한 진실들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필자의 발표를 선뜻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시대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나쁜 정치 관행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지금부터 꼭 71년 전 이승만은 남한만의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고, 끝내 그 길로 나아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승만이라는 권력자 하나만을 위한 독주정치와 민주정치의 기본인 3권 분립의 부정이라는 권력관행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를 견제해야 할 국회는 이승만이 이런저런 구실로 헌법을 위반하면서 강행한 헌법 개정을 한 차례도 저지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전·후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중대 인권범죄를 자행하는 대통령에 대해 국회는 꼼짝하지 못했다. 만약 그런 의도와 생각을 하는 국회의원이 있었다면 적색분자로 몰아 억누르면 그만이었다.

선진 각국에서 뽑아 온 알찬 기본권 조항들로 채워진 대한민국 제헌헌법이었지만 이런 폭정의 관성은 아직까지 발본색원되지 못했다. 그래서 주권자를 억압해도 무방하다는 반헌법적 정치 질서 탓에 오랫동안 진실은 질식당하였고, 침묵이 강요되어 왔다는 설명에 그 여성 언론인은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미군정 시절 발생한 제주도민학살을 집단살해의 대표적 사례로 채택하여 고등학생들에게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도 지난 9월, 미국4·3학술회의의 또 다른 성과였다. 2016년을 마감하면서 그런 나쁜 정치 70년과 작별할 수 있게 된 일은 너무나 특별한 사건이었다.

지난 10주 동안 한국 주권자들은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면서 촛불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왔다. 오랫동안 지배 권력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고, 반공 극단주의 지배 이념에 주눅이 들어 굴종해 왔던 이들이 어찌하여 이런 전복적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70년 악정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감정 때문이 아닐까? 거짓말을 밥 먹 듯하며 범죄를 부인하는 몰염치한 권력자에 대한 무언의 항의가 국민들을 엄동설한에 광장정치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은 사죄할 줄 모르는 권력자를 비난하면서도 이제는 적극적, 능동적, 역사적 태도로 돌변하고 있다. 이제 제도정치권이 변화해야 하는 근본 이유이다.

한때 풍미했던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는 허무주의를 낳아 왔지만 지금 사람들은 새로운 주권자로 진화되어 가는 중이다. 아직 이 촛불민심과 행동의 결과가 과연 평화적이고 명예로운 시민혁명을 잉태할 수 있을지 아니면 반공극단주의 보수우익 세력의 대반동을 야기할지는 누구도 확실하게 장담하지 못 한다. 그러나 이 자율혁명의 해방 공간에서 체험한 주권자들의 소중한 역사경험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될 민주주의의 자산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적폐 청산과 개혁입법을 위한 국민토론회’에 참여하면서 별안간 느낀 소감은 불행한 과거 청산은 정의 확립과 개혁의 제도화라는 숙제와 매우 맞닿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깊이 각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악정과 작별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열망은 평등과 평화의 제도화, 인권과 정의의 입법화, 원칙과 양심의 전면화로 나아갈 것이다. 아무도 이 지진 같이 찾아 온 근본적이고 거대한 변화의 요구와 흐름을 뒤로 물릴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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