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위치한 비석담.

▲비석담이란
비석담이란 영혼을 기리거나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보호하기 위해 두른 돌담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비석거리에 세워진 비석들을 보면, 비석담 대신 비석의 3면을 판석으로 막은 형태가 많다. 이런 비석들은 대개, 선정비, 효자비, 열녀비가 많다. 비석담을 두른 형태는 근대 이후라고 할 수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세워진 비석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비석담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부른 돌담 용어이다. 산담이 산(무덤)을 가운데 두고 그것을 보호하기 만든 담이라면, 비석담은 산으로 상징되는 비석을 표식으로 두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담 형태이기 때문에 산+담=산담에 버금가는 비석+담=비석담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즉 비석담은 비석을 보호하는 돌담으로 산담과 기능이 같지만 마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보다는 비석 장소의 영역 표시 기능이 더 크다고 하겠다. 비석담의 정면에는 사람이 쉽게 드나들도록 일정 크기의 공간을 텄고 한두 개의 계단을 놓는다. 비석담 정면에 배롱나무 두 그루나 사방에 네그루를 심어 여름에서 가을까지 100일 동안 비석 자리를 환하게 밝히기도 한다.   


비석이란 소위 비극적 기념비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좋은 기억도 기념하지만 슬픈 기억도 기념한다. 슬픔을 기억 속에 담아둠으로써 자연사와 같은 정상적이지 않은 죽음을 추모하고, 제대로 갈무리 못 한 채 잊히는 아픔을 극복하고 하는 것이다. 비석담을 두른 비석의 내용을 보면, 대개가 시신을 못 찾은 행방불명 된 사람들이 많다.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비석을 세움으로써 구천에서 떠도는 혼이 언젠가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기리는 망사비
비석의 종류에는 기념비(紀念碑). 충혼비, 공덕비(功德碑), 추모비(追慕碑), 추도비(追悼碑), 망사비(望思碑), 추모단, 반혼대 등이 있다. 특히 망사비, 추모단, 반혼대는 바다에서 실종되거나 타지에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무덤 대신에 세우는 비석의 유형이다. 대개 그런 비석 뒤편에는 약간 봉긋하게 표가 나게 한 것은 망자와 관련된 머리칼이나 평소 고인이 입었거나 쓰던 옷이나 신발, 물품 등을 묻는 것으로 보아 비록 시신은 없지만 그곳이 무덤 대신으로 삼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혼정(昏定)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런 비석들은 반혼(返魂)하기를 기다리는 염원이 스며있어서 헛묘의 기능과 유사하다. 대개의 망사비들은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됐거나 출타 중 변을 당해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영혼을 추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제주인이 육지에서 관리로 있다가 다시 제주로 부임하던 차에 제주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어느 곳으로 표류였는지 몰라 행방불명이 된 경우 가문에서는 그것을 기려 망사비를 세운 적이 있다. 또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있고,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에 꽃다운 21살의 나이에 징용당해 일본 해군으로 출전했다가 동해에서 작전 중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선의 폭침과 함께 바다에 수장된 사령도 있다. 특히 이 경우는 이웃 마을의 죽은 또래 처녀와 ‘죽은 혼(아래아)서(婚事·곧 死婚)’를 맺어 죽어서 사돈지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일본 상선에서 탄을 때는 탄부 선원으로 일하다가 북해도로 항해 중 급자기 분 폭풍에 수중고혼으로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해(遺骸)를 운반하러 갔다가 관을 모시고 오는 귀향길에 두 아들이 바람을 만나 침몰하여 사망한 경우도 있고, 일본에서 콜레라로 사망하자 화장을 하고 모셔온 경우 등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등의 슬픈 사연들은 근·현대제주사의 민중들의 절절한 사연으로 다가와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다양한 사연이 많다.

 

휴전을 앞두고 인민군과 전투하다 이름 모를 고지에서 전사한 경우, 육지에 출타하여 다리를 건너다가 계곡의 물이 불어 급류에 쓸려가 행방불명의 된 경우, 해양경찰이 돼 배를 타다가 사고로 배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의 경우, 학사 장교로 근무하다가 사고사로 죽은 경우, 군속(軍屬)으로 육지에 나갔다가 병으로 사망한 경우, 가파도·마라도 등지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해난사고로 죽은 경우, 남영호 침몰 사고로 마을의 처녀와 총각, 가족이 사망 한 경우 등 곳곳의 제주 마을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슬픈 사연이 넘쳐난다.

 

인간사(人間事) 야속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로병사의 큰 인생살이 속에 담긴 길흉화복의 인연의 끝은 어디인가. 태어나는 순간 시간에 쫓기는 존재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인생은 화복 모두가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의 비석담. 비석담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돌 등으로 쌓는다.

▲호모 모뉴멘탈리쿠스 
한 마디로 인간은 기념비적 동물, 호모 모뉴멘탈리쿠스가 아닌가. 역사는 인간들이 바로 자신들의 기념비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성립된 것이다. 영원불멸의 사상, 종족 보존의 욕망은 바로 기념되기를 희망하는 목표 때문에 승계되고 있다.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곧 국기가 된 것도 국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한 표상이 필요한 때문이다. 이 표상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념비 추구의 욕망 때문이다. 사실 그 욕망은 사회적 욕망으로 확대되고 국가적 기념비가 되는 것이다.  

  
지상에 아픔 없는 가족이 없고, 슬픔 없는 사람은 없다. 나를 중심으로 사회적 관계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희로애락의 고리를 돌고 있다. 상실은 안타깝고, 떠남은 아쉽다. 만남은 반갑고 이별은 슬프다. 우리가 비석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인간애의 배려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잊힌 사람이라는 말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기억해주고 부모를 기억하기를 바라고 바란다. 결국에는 자신마저도 잊힐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 기념비를 만들고, 기념되기를 희구한다.  


원래 왕릉이나 사대부의 신도비는 기념비적 인간임을 반증한다. 신도비는 비각을 지어 비석을 보호함으로써 영원성, 고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주인 경우 공덕비나 효자비와 같은 중요한 비석은 돌로 집을 만들어 보호한 것도 이와 상통한다. 제주의 마을 어귀나 산야를 잘 보라. 처음 비석담은 산담과 같이 작은 크기의 겹담을 쌓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외담에 시멘트를 섞어 바른 형태의 비석담으로 정착하였다. 왜 비석을 다시 돌담으로 보호하는가. 그것은 슬픔을 넘어선 희망의 상징이자 기념되기를 바라며 영원성으로 남고자 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