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歸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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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효(孝)’는 유교 윤리 최고의 덕목이다. 우리 정신의 근원이 수백 년을 흘러온 효 사상에 그 뿌리가 닿는다.

명절 때면 나라 안이 귀성인파로 들썩인다. 열차로, 승용차로, 여객선으로, 비행기로, 다퉈 고향을 찾는다. 객지에 나간 자녀들이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 올리고 선산을 찾아 성묘한다. 너나없이 나서는 귀성은 어제오늘의 일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풍속도로 자리 잡은 효의 실천 행렬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민족의 대이동에 놀라면서 새삼 자신의 근본을 생각게 된다.

북적거리던 서울이,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고 나면, 인구 1000만 거대도시가 삽시에 텅 빈 공동(空洞)이 된다. 귀성 뒷 풍경이다.

『세조실록』에 귀성이란 말이 보인다. 강원도 관찰사 최한경이 아뢰기를, “신의 노모가 서울에 있는데, 병이 나서 다른 사람의 집에 붙어살고 있으며, 달리 의탁할 자식이 없습니다. 청컨대 귀성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江原道 觀察使 崔漢卿 啓曰 臣 老母 在 京城 病寓人家 更無子可托 請歸省 從之)

귀성은 본시, 인간적인 욕구의 표출이랄 수 있다. 공간적 인간은 자기 영역을 떠날 경우,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된다. 죽어서라도 그곳에 묻히기를 원하며 타향에서의 죽음을 가장 불행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니까 귀성은 공간적 인간 표현의 구체적 실현 방식의 하나다. 미물인 동물도 먼 곳에 나갔다 살던 곳이나 둥지로 돌아온다. 귀소(歸巢)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정(情)의 사회라, 사회연결망의 구성 요소로 혈연과 지연을 빼 놓을 수 없다. 고향의 부모, 친척, 친구들을 만나 이를 바탕으로 사회연결망을 확인하고 보다 탄탄히 하려는 데서 귀성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어지는 귀성행렬. 영호남으로 제주로, 도도한 강물의 흐름을 방불케 한다. 귀성을 위해 연전에 열차표를 사고, 발 빠르게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다. 고향이 섬이거나 섬 중 섬이어도 상관없다. 차와 배를 갈아타며 기어이 고향 땅에 발을 놓는다. 하늘, 땅, 바다가 온통 귀성객들로 들끓는다. 귀성길 고생길이다, 길 위에서 거북이걸음으로 시달리면서도 끊이지 않고 긴 흐름을 이룬다.

초가삼간이면 어떠랴. 바라는바 오직 고향에 가 부모형제를 만나는 기쁨이다. 귀성은 우리를 들뜨게 하는 가슴 설렘이고 기다림이다.

공항이나 부두터미널이 만남으로 들썩인다.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껴안고 손을 맞잡아 반긴다. 귀여운 손자 손녀를 안아 들추고 입 맞추고 볼을 비비는 모습은 명절 때 흔히 볼 수 있는 훈훈한 풍경이다.

명절을 예전엔 명일(名日)이라 했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축일(祝日)이다. 세상이 변하면서 명절 풍습도 많이 달라졌다. 설 때 입는 옷이 설빔, 그날 먹는 음식이 절식, 그네뛰기와 연날리기는 명절 놀이였지만 이젠 사정에 따라 선별적으로 이뤄진다. 설 때면 어른을 찾아봬 절하고 덕담 듣던 세배마저 사라지니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연년이 이어지는 귀성. 그 말 속엔 ‘고향’과 ‘부모’가 핵심에 자리한다. 고향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부모는 나를 낳고 길러 준 육친이다. 고향과 부모란 말엔 그 바탕에 그리움이 고여 있어 질퍽하다.

지연과 혈연에 대한 그리움의 문화적 표출, 귀성!

자녀들은 선물 가방을 끌러 놓는다. 부모는 도시로 돌아가는 자식에게 바리바리 싸서 보낸다. 명절 퇴물이며, 몸소 장만한 곡물, 지난 가을에 따 둔 과일, 텃밭에서 갓 뜯어낸 푸성귀….

귀성이 있어 우리 사회가 따습고 도탑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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