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어서 갔으면
겨울이 어서 갔으면
  • 제주신보
  • 승인 20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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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유리문이 부옇게 흐린 해장국집 안으로 들어섰다. 빈자리 없이 들어찬 사람들로 실내가 후텁지근하다.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 곁의 공사장 인부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모양이다.

외관은 허름한 집이지만 음식값이 저렴하고 양도 푸짐하다. 해장국집이 허우대 좋게 겉을 치장한 것보다, 수더분한 아낙네 같은 분위기라 더 좋다. 서민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대표 음식이 해장국이다. 김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허기진 장정들의 속을 든든하게 채울 수 있어 보인다.

우거지를 푹 삶아 콩나물과 대파, 돼지 머리 삶은 것을 큼직큼직 썰어 넣고 구수한 선지를 그득 넣어 끓여 낸다. 얼큰한 국물이 담백한 게 일미다. 혀가 델 만큼 뜨거워 추위로 움츠렸던 몸에 온기가 돈다. 춥고 가슴 시린 사람은 따듯한 국물만 들이켜도 위안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자욱했던 시야가 트인다. 왁자지껄한 틈에서 국물을 떠먹다 주위를 돌아본다. 거의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듯하다. 덥수룩한 머리에 꺼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막걸리를 들이켜는 눈가엔 삶의 고단함이 얼룩졌다. 한 잔의 막걸리로 풀어내는 짙은 음영의 얼굴이 한겨울 추위만큼 고달파 보인다. 이른 새벽부터 힘든 노동일을 했을 테니 얼마나 출출했을까.

이런 집에선 우아하게 격식을 갖추어 점잔 뺄 일도 없다. 으스대며 두툼한 호주머니 사정을 자랑할 분위기도 아니다. 찬도 시큼한 깍두기 한 접시면 그만이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쩝쩝거리며 국물을 후루룩후루룩 마시거나, 코를 소리 내어 풀어도 개의치 않고 다들 그러려니 한다.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찾아드는 집, 소박한 서민들의 체취가 풍긴다.

해장국은 전날 숙취로 거북한 속을 풀기 위해, 주로 남자들이 아침에 먹던 국이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남녀 가리지 않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왁자하게 가족을 대동하고 오는 모습을 보면 소박한 외식으로 손색없어 보인다.

음식 맛에도 향수가 있다. 속이 허해 입맛이 없거나, 옛날 시골집에서 먹었던 게 생각나 가끔 찾게 된다. 추수를 마무리하고 김장까지 끝나면, 무청과 시래기를 엮어 해가 잘 드는 추녀 밑에 주렁주렁 매달아 말렸다. 겨우내 시래기나 우거지를 삶아 굴을 듬뿍 넣고 끓였던, 아침에 할아버지를 위한 할머니의 해장국 맛을 잊을 수 없다. 된장을 주물러 간을 맞추던 구수한 손맛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계산대 곁엔 해장국 값을 올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동안 인건비도 적잖이 올랐는데, 높은 일당을 주면서도 일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는 업소의 하소연도 딱하다. 그나마 해장국은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근한 음식인데…. 하루 다르게 오르는 먹거리 물가에 숨이 가쁘다.

점점 살기 힘들다는 서민들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겨울바람으로 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세상살이는 나날이 어려워지고, 넉넉지 못한 빈자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춥다. 누구나 한 끼를 걱정하지 않고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운 계절이다.

장바구니를 들고 무엇으로 채울까 기웃거리며, 지갑 사정을 저울질하는 주부들의 시름이 깊다. 한번 날개를 단 물가는 내릴 줄 모른다. 거기다 국민들의 울타리가 되어 걱정을 덜어야 할 나라는 안팎으로 어지러워 희망을 품기조차 조심스럽다.

곧 입춘이다. 서민들에게 봄은 언제 올지. 나라도 가정 살림도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웅크리고 종종걸음치는 겨울이 어서 갔으면 기도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