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관을 만드는 재료로 이용됐던 비자나무.

▲관 만드는 나무


옛날 육지에서는 오동나무를 관재의 제일로 쳤다. 제주에서는 오동나무가 귀해서 단단한 가시나무를 선호했다. 가시나무는 이름과는 달리 가시가 전혀 없는 나무로 참나뭇과에 속한다. 가시나무는 참가시나무, 종가시나무, 붉가시나무, 개가시나무로 나뉜다. 이들 가시나무의 차이는 잎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시나무와 참가시나무, 개가시나무는 타원형 잎 가장자리 전체에 톱니가 있고, 종가시나무는 잎 가장자리 1/2에만 톱니가 있으며, 붉가시나무는 잎에 톱니가 없다. 열매는 도토리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작고 끝이 뾰족하다. 가시나무는 한자로 가사목(加斜木), 가사목(哥斯木)이라고 표기하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속칭 가사목은 탐라에서 나는데 즉 이년목(二年木)이다(俗名哥斯木 産於耽羅 卽二年木也)’라고 했다. 이 이년목은 제주의 산물(産物)로 비자나무와 함께 배 만드는 재료(船材)로 썼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이형상의 ‘남환박물’에도 이년목이 제주에서 자라는 나무로 기록돼 있다. 이 이년목은 종가시나무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목사 이규성(李奎成)의 재임 시(1706~1709) 만든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에는 ‘가시목(加時木)’과  ‘이년목’이 나란히 표기 되었으니 같은 속의 나무인지 다른 종의 나무인지 상고(詳考)할 수가 없다.      


이들 가시나무는 난대림에 자라는 상록 활엽수 교목으로 높이 15~20m 정도 자라고 지름 은 50cm 이상 몇 아름에 달한다. 나무 색깔은 회흑색이며 매끈한 편이다. 특히 붉가시나무는 목재의 색깔이 붉은색이 강하여 붉가시나무라고 하는 것으로 제주도와 남해안에 자라는 나무다(박상진·2013). 나무의 강도가 높아 잘 썩지 않아 가구용으로 선호했다. 사실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서 옛사람들도 살아있을 때 미리 관재나 개판을 준비하는 것은 흉사(凶事)나기를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버이를 위한 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치관(治棺)’의 주(註)에도 “초상 날에 관재 나무를 고르게 되면 적당한 나무를 고를 수 없으므로 살아있을 때 미리 좋은 관을 준비해 두는 것은 오히려 효성 어린 행동”이라고 했다.


제주의 옛사람들은 가시나무가 매우 단단해서 관재(棺材)나 관을 보호하는 개판(蓋板)으로는 최상으로 생각했다. 또 제주 사람들은 부모나 자신을 위해서 평상시에 개판용으로 굴묵이(느티나무)나 구할 수 있으면 상·장례를 대비하여 미리 마련해 두었다.

 

   
▲ 소나무 관재. 과거 제주에서는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었으나 최근에는 소나무가 일반적이다.

현재 제주에서 사용되는 관재(棺材)는 보통 소나무가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구실잣밤나무, 노가리 나무, 비자나무, 향나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재의 수요는 많으나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여건으로 인해 한라산에서 자라는 단단한 나무들을 구할 수 없어 육송이나 수입나무로 대신한다. 부모님을 위해 지극 정성으로 마련하는 관재나 비석 돌 마련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특히 요즘은 화장을 선호하다 보니 소나무, 나왕이 흔하고 고급목재로는 장미목이 관재로 이용된다.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에 의하면, 과거 육지에서는 관재로 유삼(油衫)이 제일 상품(上品)으로 치고, 다음이 잣나무를 선호했다. 유삼(油衫)은 이깔나무라고도 하는데 전나무과에 속한 낙엽 침엽교목인데 요즘은 주로 전신주, 건축재, 침목으로 쓰이는 나무다.


▲관 짜기


치관(治棺)은 상례의 한 절차로 관을 짜는 것을 말한다. 이를 조관(造棺)이라고도 한다. 망인의 동네, 혹은 주변 마을의 소문난 목시(목수)에게 의뢰해 관을 만든다. 관의 크기와 깊이는 망인의 신체적 조건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관 짜는 나무는 상주의 의견에 따라.혹은 집안 사정을 고려해 경제적 여건, 혹은 미리 준비된 관재가 있으면 그것으로 관을 짠다. 관 이외에 개판(蓋版:橫板), 마목(馬木), 칠성판을 같이 준비한다. 원래 칠성판은 얕은 판자에 일곱 개의 북두칠성 모양의 구멍을 뚫고 관 밑바닥에 깔았다. 그러나 요즘은 관 바닥에 주사(석간주)나 먹으로 북두칠성을 그리거나 한지에 북두칠성을 그려 관 바닥에 그 종이를 까는 것으로 대신한다. 관 속 모서리는 풀을 발라 그 위에 한지로 도배를 한다. 시신의 물이 흐르지 않게 함이다. 예전에는 관 속에 칠하는 재료가 달랐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관 모서리 봉합하는 부분에는 송진이나 옻칠을 한다.”라고 했다. 관 뚜껑을 천판(天板)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붙일 때는 은정(銀錠·일종의 나무못)을 사용한다.

 

   
 

18세기 정조년 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읍지(濟州邑誌)’에는 상장례와 관련된 책이 제주에 보급됐는데,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와 ‘의례문해(疑禮問解)’가 그것이다. 특히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송진을 납촉(蠟燭·초를 녹인 것)에 버무려 관 속의 봉합한 곳을 칠하고 소나무 검댕이나 옻은 관 바깥에 칠한다. 더러는 송진을 가루로 만들어 관 안팎으로 고루 바른 다음 쇠붙이로 지져 나뭇결을 따라 스며들게 하고 검은색 천이나 종이로 관 속 사방이나 천 판을 바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따로 녹색 비단을 네 모서리에 붙인다.”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달라진 모습으로 새 문화를 수용하다. 요즘은 관 안쪽 모서리 부분에 풀을 쑤어 한지로 도배한다.


상복(喪服)을 만드는 절차를 성복(成服)이라고 하는데 목수가 관을 짜는 자귀 소리가 집안에 들려야 상복을 만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각자 상례 준비에 바쁘다.

 

   
 

▲사둔 집 팥죽 쒀가기


관을 짜는 날에는 사돈집에서 상주와 상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팥죽을 쑤어 온다. 남원읍에서는 당사둔(사돈) 집은 두 허벅, 형제와 사돈 맺은 집은 한 허벅을 쑤어 갔다. 한 허벅 당 소요되는 쌀은 두되, 팥은 반 되 정도이다. 팥죽은 상제(喪主), 복친(服親·방상), 일 보는 사람들을 위한 요기인데 상례를 당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밥을 준비하지 못해 죽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혹은 상주가 슬픔에 겨워 음식을 먹지 못해 속이 아플까 봐 죽으로 대신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팥을 사용하는 것은 사악한 것을 막는다는 터부 때문이다. 팥은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궂인 것(惡鬼)’을 쫓는 기능이 있다. 대정지역에서는 상갓집의 인원수를 헤아려 허벅 통수를 가늠했다.


한경면 지역에서는 팥죽을 한 허벅 쒀 오는데 형제가 많아 사돈이 많으면 팥죽 허벅도 그만큼 많아진다. 친척들은 돌래떡으로 고적을 하며 딸 상주들은 제팬, 침 떡, 인절미, 새미 떡, 곤 떡 등을 제물로 차린다. 요즘은 팥죽을 쒀가는 집이 없어서 팥죽 대신 사돈집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라면, 빵, 음료수 등 1인용으로 기성 상품을 각자 나누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