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솟아오른 꽃과 놋그릇 사이로 詩心이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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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머체·행기머체>

거기서 그대는 손 흔들고 계시라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참꽃나무 구실잣밤나무 떨잠 얹힌 족두리

 

세화리 지나 가시리

가만히 다녀오던 어머니 곁

둥근 눈썹 넘듯 넘어가던 마을

 

무량히 손 흔들던 초록 떨새들

해 저물녘 출렁인다

 

건너편의 아름다운 그대여

온전하게 나를 가질 수 없음이 생의 마지막 슬픔 일지라도

마음 내려놓지 마시라

 

내가 이 푸른 저녁을 건너 그대에게 갈 때까지

그대에게 꽃 한 송이 될 때까지

 

- 강영란의 ‘꽃머체’

▲ 꽃머체에서 진행된 장영춘 시인의 시 낭송 모습.

입춘 날, 정석비행장 낀 도로를 달린다. 머지않아 유채꽃 만개할 길, 마을에 이르기 전 우리나라 최초 리립박물관(조랑말박물관) 인근의 꽃머체. 가시천의 안내로 당도하자 탄성들 절로 난다. 뿌리와 뿌리로 맞잡은 정이 느껴진다는 둥, 일행의 감흥 꿈틀거리나 보다.

 

냇물인 듯 바람결인 듯 장영춘 시인이 시낭송을 한다. 강영란 시인의 시심에 들어 어지러운 세상 잠시 잊는다.

 

머체란 바위너설쯤의 제주어로 바위에 핀 꽃, 꽃머체다. 이름만으로도 한 편의 시, 거기에 화자의 이야기 담았으니, ‘바람 난장’ 흥겹지 않으랴. 꽃과 나무와 뿌리, 아름다운 공생의 거대한 석부작, 인간사보다 성숙한 생의 지도를 본다. 측면에 넉넉한 표정의 음각 두상의 미소는 수수께끼다.

 

▲ 왼쪽부터 허영숙(사진)·임성호(미술)·장영춘(시)·고해자(수필)·이상철(음악·공연)·김해곤(그림)씨의 모습.

겨울 끝자락의 민낯, 근처 큰 나무 아래 군림하던 올빼미 형상의 벌집이 위태롭다. 휑한 바닥에서 융성한 과거 움켜쥐고 남 탓인 양 서성인다.

 

꽃머체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행기머체다. 이 앞에서 정욱성 클라리네티스트의 ‘꽃피는 봄이 오면’(영화 음악), ‘향수’(정지용)를 감상한다. 운치를 더하는 이슬비, 출석 저조를 눈치채 목 뺀 갈대와 머체 식구들, 물먹은 잔디도 고개 들어 리듬 탄다, 추억을 탄다. 향수 연주에 어느 시인은 나직이 따라 부른다. 아들이 이승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

 

연주 끝나자 임성호 화가는 갑자기 시낭송을 하고 싶다며, 숫제 오승철 시인의 시집을 들고 와 ‘행기머체’를 낭송한다.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행기머체의 모습.

그게, 그러니까 정말로 거짓말같이

누가 단을 쌓고 설법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봄의 들판에 솟아난 놋그릇 바위

 

이 세상 어느 허기 돌아오질 못하는가

오름 두엇 집 두엇 갑마장길 무덤도 두엇

사람이 왜 왔느냔 듯 수군수군 갈기 몇 개

 

성읍에서 의귀리 또 거기서 가시리

<4.3땅> 화산섬의 범종 같은 바위 앞에

“고시레” 허공에 고하는 메아리에 젖는다

 

 -오승철의 ‘행기머체’
 

 

‘범종 같은 바위’에 나앉은 돌이끼들, 백발 수염인 듯 매만지자 빈 가지에 솟던 꽃봉오리들 고쳐 앉는다. 새겨둔 상형문자는 후대에 남길 심사인지 설법이 길다. 얼마를 비워내느냐에 따라 그릇 크기가 달라진단다. 놋그릇은 대체 어디쯤에 놓였었을까.

 

땅속 용암 덩어리가 세월을 업고 지표 위로 돌출된 화산지형, 세계적인 희귀성만큼 껴안는 속살 어찌 다 헤아릴까. 어디선가 갈기 휘날리는 갑마의 말발굽소리 닿을듯하다.

 

머체는 타자를 꽃이게 하는 조력자다. 올려다보게 되는 시원들, 더불어 사는 이치에 한껏 젖다.

 

▲ 임성호 作 無心.

-글=고해자 수필가

-그림=임성호 화가

-사진=허영숙 작가

-시낭송=장영춘 시인

-클라리네티스트=정욱성

-음악·공연 감독=이상철

 

※다음 바람 난장은 11일 오전 11시, 애월읍 구엄리 돌염전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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